[임성원 칼럼] 메멘토 모리, 세상의 평화를 위해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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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모든 것 내려놓고 떠난 김동길 박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 떠올리게 해
팬데믹 저물면서 핵전쟁 위기 고조
한반도에도 ‘강 대 강’ 핵무장 고개
공멸의 전쟁이냐 상생의 평화냐
탐욕·집착 벗어나 죽음과 대면해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군 전술핵운용부대 등의 군사훈련을 지도하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군 전술핵운용부대 등의 군사훈련을 지도하며 "적들과 대화할 내용도 없고 또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5일부터 지난 9일까지 인민군 전술핵운용부대·장거리포병부대·공군비행대의 훈련에 참석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0일 밝혔다. 연합뉴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다. 독일의 오래된 속담이면서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 희곡의 제목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서양 격언을 갑자기 떠올린 것은 지난 4일 김동길(1928~2022) 박사의 부고를 접하고서다. 민주투사에서 보수 진영의 원로에 이르기까지 양극단을 오갔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 그의 삶을 둘러싼 평가조차 부질없게 만들었다. 시신은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했고, 자택은 누나인 고 김옥길 여사가 총장을 지낸 이화여대에 기부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다.

1970~80년대 이 땅에서 젊은이로 살았던 사람치고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고인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각자의 몫이 됐다. 그가 강의를 맡은 ‘서양문화사’ 수업은 인근의 여대생들도 불러들일 만큼 늘 열기와 위트로 넘쳤다. “여러분, 백인하고도 연애하고 흑인하고도 연애하세요. 그렇게 다른 인종과 섞여 연애하고 결혼해서 애를 자꾸 낳아야 인종차별이 없어지고, 세상도 평화로워집니다.”


한 페친은 SNS에서 고인을 이렇게 추억했다. 고2 때 그가 마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 친구와 담치기를 해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분단은 하느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린 시련이자 축복입니다. 남쪽은 자유, 북쪽은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 이 둘이 통일하면 이 지구에 자유와 평등이 융합한 새 나라로 우뚝….” 그때의 김동길은 민주투사였고, 그때의 김동길만 기억하겠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유럽의 한 수도원에서는 일정한 시간에 맞춰 수도사가 복도를 다니며 라틴어 ‘메멘토 모리’를 외친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반야를 얻기 위한 불교 수행법인 백골관과 닿아 있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삶을 돌아보게 하는 데는 죽음만 한 것이 없다는 뜻일 터이다.

메멘토 모리는 전쟁 혹은 평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옛날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개선식 때 노예를 시켜 뒤에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우쭐대지 말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뜻에서다. 평화는 흔히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일컫는다. 죽음은 전쟁과 평화를 뛰어넘으며, 따라서 메멘토 모리가 강조되는 것이다.

세상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평화에서 전쟁의 시기로 이동 중이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세계의 진영 갈등이 첨예화하면서 핵전쟁까지 공공연하게 입에 올리는 대재앙의 시대를 맞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영토 안전성이 위협받을 때 우리는 국가와 국민 방어를 위해 분명히 모든 수단을 쓸 것”이라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핵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반도 상황은 시시각각 위협의 강도가 느껴지는 실제 상황이다. 북한이 잇단 미사일 시험발사에 이어 ‘핵 선제 사용’을 법으로 규정했다. 최근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술핵 운용부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에 맞서 남쪽도 ‘핵무장론’이 분분하다. 주한미군 기지 전술핵 재배치, 핵잠수함과 폭격기 등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상시 배치 논의도 확산일로다.

가깝든 멀든 핵전쟁 위기가 강 대 강으로 치달을 뿐 중재나 타협의 설 자리가 없다는 점에서 자칫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적이 우려스럽다. 더욱이 국내 정치권이 보이는 행태는 더 가관이다. 여야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안보 문제를 놓고 패를 나눠 티격태격 싸우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특히 한·미·일 연합훈련을 놓고 ‘친일’ ‘친북’ 프레임으로 맞붙어 국민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1945년 8월 역사상 처음으로 핵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핵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살아 있는 학습장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가공할 파괴력의 핵무기는 77년이 지나도록 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위력이 1kt(TNT 1000t의 폭발력) 미만에서 수십kt 수준으로 국지전에 사용할 수 있는 전술핵무기들이 속속 개발되면서 인류는 다시 핵무기 사용의 유혹에 직면해 있다.

메멘토 모리.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죽음을 기억하라고 늘 일깨운다. 공멸하는 전쟁의 길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상대에게 섞여 들어가고 한데 융합해 가는 평화의 노력이 요구된다. 다시 고개를 드는 핵전쟁의 위기 속에서 탐욕과 집착을 벗어던지고 죽음과 의연하게 대면할 수 있는 메멘토 모리 혹은 백골관의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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