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국가의 역할

김마선 기자 m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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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선 정치부장

핼러윈 앞둔 지난달 이태원 참사
국가의 역할 돌아보는 계기
주최 없다며 경찰·구청 등 부실 대응
한두 명 문책으로 해결될 일 아니야
공동체 안전, 국가의 최우선 의무
느슨해지는 순간, 또다른 희생양

미리 썼던 글을 싹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쓴다. 핼러윈을 앞둔 지난달 29일의 참사. 이 일을 두고 한가하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정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가. 우리는 과연 안전한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돼야 할까. 그래서 다시 묻는다.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날 밤 서울 이태원에서 156명의 꽃다운 이들이 숨졌다. 또 151명이 다쳤다. 거리 두기가 완화한 상황에서 여러 위험 징후가 있었다. 하지만 경찰, 구청, 시청 등의 행정기관은 사실상 손을 놓았다. 주최자 없는 행사라는 이유 때문이다. 지난 1일 공개된 112 녹취록에 말문이 막혔다. 사고 4시간 전부터 현장에서 ‘압사’를 경고하는 다급한 신고가 잇따랐다. 그 순간 국가는 없었다. 뒤늦게 윤희근 경찰청장은 “대응이 미흡했다”고 사과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것만도 충격적이다. 파출소의 기동대 지원 요청은 묵살됐고, 사고 전후 행정안전부·경찰청의 컨트롤 타워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통령 보고 뒤에도 행안부 장관, 경찰 지휘부는 참사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와중에 사찰 논란까지 불거졌다. 참사 다음 날 경찰청에서 만든 진보 성향 단체 관련 ‘정책참고자료’ 때문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경찰이 적절히 대응하지 않은(또는 못한) 이유는 뭘까. 사고 직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경찰과 소방 대응이 사고 원인이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런 참사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일 “국민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사고 엿새 만의 첫 공개 사과였다.

경찰청은 수사에 박차를 가한다. 지난 2일 용산경찰서, 서울경찰청, 용산구청, 서울시소방본부, 서울교통공사 등 8곳을 압수수색했다. 국회에서는 국정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 윤희근 경찰청장 경질설이 나돈다. 그러나 한두 명 자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다.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이 장관의 말을 곱씹어 보면 ‘자유방임적’ 기조가 은근히 풍긴다. 세상은 알아서 잘 돌아가고, 정부 개입이 외려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작은 정부론’이다. 이는 그를 임명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기조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은 ‘자유’를 유난히 강조한다. 5월 취임사에서 35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33번,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21번 외쳤다.

여기에서 자유는 뭘까. 윤 대통령은 그동안 ‘자유연대’를 역설했다. 이를 통해 중국,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 맞선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를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기업의 역할, 규제 완화, 세금 감면, 재정 축소 등 ‘경제적 자유’를 내포한다. 이는 공적 시스템과 사회안전망 축소 등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자유는 곧 자율이다. 자기 이유와 책임 아래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고 이후 경찰관직무집행법 등 경찰의 개입 근거를 찾느라 바쁘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다. 올 9월 태풍 때 윤 대통령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엄중히 대처하라”고 지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소홀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말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정치의 목표는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이다. 보수와 진보는 거칠게 보면 국가적 자원과 역량을 어디에 좀 더 집중할 것이냐의 차이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공동체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다. 이번 참사를 통해 ‘작은 정부’를 돌아본다. 상황에 맞게 정부가 더 해야 할 일과 덜 해야 할 일을 잘 판단해야 하는데, 대전제가 ‘안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망자’냐 ‘희생자’냐, 합동 분향소 표기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인간 공동체는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유지돼 왔다. 안전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졌을 때 어김없이 희생양을 찾는다. 대표적인 예가 전쟁과 사회적 참사다. 위정자들이 최우선해야 할 가치는 공동체 안전이다. 이는 언론을 포함한 ‘살아남은 자들’의 역할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이번 참사의 ‘공범’이라는 반성이 필요하다.

현 정부가 출범한 지 딱 6개월이 지났다. 정부는 지난달 29일을 기점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마치 그날 출범한 것처럼. 국가의 역량과 자원을 배분하는 데 행여 구멍이나 그늘은 없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 안타까운 희생이 헛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자유는 자칫 공허하거나, 위험할 수 있다.


김마선 기자 m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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