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이태원 참사, 너무 이른 망각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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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신문센터장

참사 초기 엄숙했던 추모 물결
금세 사그라지며 잊혀지는 듯
망각은 사회적 책임감 무디게 해
모두가 주시할 때 반성하며 개선
깊은 공감 오랜 기억으로 이어져
유족들이 방법 찾을 기회 보장해야

언뜻 캐럴이 들리는 듯했다. 귀를 의심했지만 틀림없었다. 매장 가득 울리는 선율이 차분한 편이어서 그다지 거북하진 않았다. 흥겨운 멜로디의 캐럴은 아니니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며칠 전 동네 노래자랑 소리가 때마침 떠올라 별안간 마음이 불안해졌다. 최근 어느 축제 현장을 지나칠 때였다. 누군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대형 스피커를 통해 동네방네 울려 퍼졌다. 신명 나는 트로트 곡조였다. 벌써 이래도 되나 싶었다. 불편하고 불안했다.

‘이태원 참사’ 때문이다. 퍽 자연스러운 듯한 일상의 환경과 마주치면 어색해진다. 너무나도 가슴 아픈 기억인데 이토록 재빠르게 옅어질 수 있나 싶어 안타깝다. 언론사 사회부장으로 일하며 매일 참사 관련 소식을 꼼꼼히 챙기다 보니 더 민감해졌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축제도 모임도 행사도 모조리 취소하던 참사 초기에 비해 요즘은 너무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참사 초기 자리에 앉으면 누구라도 먼저 말을 꺼내 다 같이 안타까워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지금은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더러 있을 정도다. 참사를 각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언쟁을 벌이던 술자리 모습도 이젠 거의 사라졌다. 집단의 기억이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아직 참사가 벌어진 지 한 달이 채 안 지났다.


잊혀지는 건 무서운 일이다. 참사 희생자 유족에겐 두려운 현상일 수도 있다. 책임이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희생의 안타까움들이 완전하게 공감되지도 못했다. 망각은 사회적 책임감을 무디게 만든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주시할 때 우리는 깊이 반성하며 고쳐야 할 걸 찾는다. 고통과 슬픔을 함께 치유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외면하고 잊으면 필연적으로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원점 회귀할 수밖에 없다.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화재 참사를 봐도 알 수 있다. 지난 6월 어느 날 새벽 해운대구 한 고층 아파트 단지에서 불이 나 입주자 한 명이 숨졌다. 사망자가 나와 안타깝지만, 비교적 흔한 유형의 화재 사고라 누구도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에 신경을 기울일수록 문제가 부각됐다. 처참한 화재 현장을 확인한 〈부산일보〉 사회부 기자는 부상자 2명의 상태도 위중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예의 주시했다. 결국 화재 사고는 가족 3명이 차례로 숨지는 참변으로 귀결됐다. 단순 사고를 외면하지 않고 파고든 기자들은 그 속에 엄청난 실수가 숨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화재 희생자들이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숨진 건 화재경보기가 정상적으로 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화재 직전 아파트 다른 동에서 화재경보기가 오작동되자 관리사무소 직원이 아파트 전체 경보 시스템을 꺼버렸다. 화재경보기가 13분가량 먹통이 된 사이 진짜로 불이 났다. 인재였다. 지역 언론과 정치권 등이 일가족 참변을 추적하자 묻혀 있던 사건의 진상이 하나씩 드러났다. 결국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7명이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흔한 화재 사고를 잊지 않고 계속 떠올리며 주시한 결과다.

너무 이른 망각이 걱정스러웠던 참에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족들이 나섰다. 이름도 얼굴도 애처로운 슬픔도 가려진 희생자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참사가 벌어지기까지 어떤 잘못과 문제가 있었는지를 정확히 확인해야 한다. 유족들의 요구도 그것이다. 철두철미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더불어 유족들은 생존자를 포함한 참사 모든 피해자의 소통 기회와 공간 보장을 요구한다. 희생자 이름 공개 의사를 유족에게 신속히 확인해 추모 대책을 마련할 것도 촉구한다. 기억에는 공감과 공유가 필수다. 희생자 158명 개개인의 애달픈 슬픔이 세상에 전해질 때 더 오랜 기억으로 이어질 수 있다. 꽃다운 청년 모두가 하나의 우주였고, 그들의 가족에겐 세상의 전부였다. 애절한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아무 잘못 없는 그들을 떠나보내게 만든 우리의 허술한 시스템에 분노하지 않을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익명으로 파편화된 희생자들은 한 묶음으로 뭉뚱그려지기 쉽다. 희생자와 유족 저마다의 슬픔으로 애절하게 기억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158명의 희생 덕에 우리가 많이 배우게 됐다’는 따위의 헛소리도 난무한다.

구체적인 슬픔으로 추모되기 위해선 먼저 유족들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들끼리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국정조사 수사 등을 통한 진상 규명과 동시에 개별 희생자를 세상과 연결 짓는 과정이 필요하다. 방법을 따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유족들의 자유로운 만남만 보장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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