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로 틔워주고 신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군주”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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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군주의 자격을 묻다/방상근

장인 한명회 힘입어 ‘어쩌다 왕’
연 240일 공부, 문화융성 문 열고
‘교화’ 시대 이념 내세워 풍속 재정비
개혁·통합 ‘두 마리 토끼’ 잡아

운 좋게 왕이 된 조선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 대의 극심했던 혼란을 수습하면서 치세를 ‘교화의 시대’로 만들고자 했다. 사진은 성종의 능인 선릉. 문화재청 제공 운 좋게 왕이 된 조선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 대의 극심했던 혼란을 수습하면서 치세를 ‘교화의 시대’로 만들고자 했다. 사진은 성종의 능인 선릉. 문화재청 제공

<성종, 군주의 자격을 묻다>는 개혁과 통합의 2마리 토끼를 잡은 조선 제9대 국왕 성종(1469~1494)의 정치를 살핀 책이다. 성종은 25년 재위했으며, 38세로 승하했다.

무엇보다 성종은 운 좋게, 갑자기 임금이 된 처지였다. 숙부 예종이 1년 6개월 만에 승하한 것이었다. 성종은 할아버지 세조의 장손도 아니었고, 왕이 될 서열에 들어있지 않았다. 당대 실권자인 장인 한명회 덕을 크게 봤는데 ‘혼맥’에 힘입은 불안한 출발을 한 것이었다. ‘어쩌다 왕’이 된 것이다.

성종이 임금이 된 것은 13세 때였다.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적 소양을 닦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했다. 성종은 조선왕조에서 경연을 가장 많이 개최한 군주였다. 재위 7년까지 연 수업 일수가 228~243일이었다. 호학의 군주였던 세종보다 더 많은 경연을 열었다.

성종의 일관된 호학(好學)과 호문(好文)은 나라와 조정 분위기를 바꿨다. 조선시대 학술과 문화가 크게 번창한 때가 전기에 세종과 성종, 후기에 영조와 정조대였는데 성종은 그야말로 문화 융성 시대를 열었다. 국내외 도서를 구입하게 했고, 책의 보급을 위해 새로운 활자인 갑진자(1484)와 계축자를 만들었다. 세종에 이어 ‘사가독서제’도 실시했다.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집에 있으면 공부에 방해된다고 매년 5~6명이 산에서 독서할 수 있는 ‘독서당’을 만들기도 했다. 준비되지 않은 왕으로서의 단점을 제도적으로 승화해나갔다.

성종은 시대 이념을 ‘교화’로 삼는다. 성종 시대는 ‘교화의 시대’였다고 한다. <성종실록>은 다이내믹하지 않다고 한다. 군자와 소인에 대한 논의와 논쟁이 장황하게 나오고, 교화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누가 소인이고, 누구의 심술(心術) 즉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하다는 등 에피소드 같은 사소한 사건들이 매우 진지하고 장황하게 나열돼 있다고 한다. 이것이 교화 시대의 내면이었다. 그것은 성종이 할아버지 세조 때의 극심한 혼란을 수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조의 정변과 권력 찬탈, 사육신 사건, 단종 폐위와 사사, 이시애의 내란 등에 의해 무너져 내린 왕조의 풍속을 바로잡아야 했다.

마음의 영역에까지 이르는 교화는 참으로 어려웠다. 태종과 세종, 세조까지 이어진 ‘제도적 정(政)의 시대’에서 이제는 ‘마음을 바꾸는 교(敎)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그래서 보급한 책이 <소학>과 <삼강행실>이었다. 성종 때 일어난 풍속 사건이 ‘어우동 스캔들’이었다. 이 사건의 파장이 컸던 것은 무엇보다 종친이 깊이 연루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어우동의 전남편은 스캔들을 일으킨 종친과 6촌 간이었고, 그 종친은 이런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우동에게만 극형이 떨어졌다. 성리학적 여성관, 그게 시대적 한계였을지 모른다.

성종 대 비극의 씨앗이 거기에 있었다. 연산군의 친모 윤씨를 폐비하고, 사사했다. 교화를 내세운 성종은 윤씨에게는 왜 그토록 모질게 했을까. 윤씨가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의심했으며, 남편을 죽이고 수렴청정한다면 왕실과 국가까지 뒤흔들 수 있다고 봤다는 것이다. 결국 폐비 윤씨 사사는 차후 연산군 대에 왕실과 국가를 흔드는 일이 되고야 만다.

하지만 성종의 전체적 면모는 균형감을 갖춘 군주였다는 것이다. 훈구대신들을 견제했으나 죽이지는 않았고, 신진 사림들이 목숨 걸고 간언하는 것을 기꺼이 용납했다. 그것을 통해 낡은 정치를 혁파하고, ‘포용과 통합의 군주’가 됐다. 성종은 <경국대전> 완성으로 통상 조선의 통치 제도를 완성한 임금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성종은 당대 ‘거룩한 덕과 지극한 교화’를 실천한 임금으로 기억됐다고 한다. 승하한 뒤 묘호를 정할 때 거의 ‘인종(仁宗)’으로 기울었을 정도였다.

등극 초기에 ‘현석규 탄핵 사건’과 연관해 언론이 임사홍이란 권력에 놀아난 것이 드러났을 때 연루자들을 정도껏 견책했으나 다 살려줬다. ‘도의 권위가 군주보다 높다’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던 이가 성종이었다. 힘든 길을 우회했으나 ‘아름다운 정치’를 이뤘던 이가 성종이었다. 그런 균형감이 북방 여진, 남방 왜에 대한 대외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면서 조선의 군사적 자주권을 지킨 이가 성종이었다. 왕의 권력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언로를 틔워준 것이다. 왕조 시대에 ‘신하의 도는 의를 따르는 것이지 군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직언도 용납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생각과 견해가 표출되고, 그것에 의해 나라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신하들에 의해 끌려간 것이 아니라 신하들을 그렇게 움직이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군주의 자격이라는 것이다. 방상근 지음/푸른역사/416쪽/2만 3000원.


<성종, 군주의 자격을 묻다> 표지. 푸른역사 제공 <성종, 군주의 자격을 묻다> 표지. 푸른역사 제공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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