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하의 월드 클래스] ‘백지’도 맞들면 낫다
정치부 기자
“한국 기자가 어떻게 이 곳을 알고 들어왔나요?” “스스로 기자임을 증명해 보세요.”
기자가 중국의 ‘백지시위’ 참가자들이 모여있는 글로벌 메신저 대화방에 처음 접촉했을 때 몇몇 참가자들이 경계심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로 질문했다. 이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어떻게 해서 그들을 찾을 수 있었는지 설명했다. 또한 한국 기자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한국어와 영문으로 표기된 명함의 양면을 사진으로 찍어 그들에게 전달했다. 더 나아가 인터뷰를 하더라도 민감한 정보를 적지 않겠다고 알렸다. 그럼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중국공안의 감시가 번득이고 있으니 그들의 이런 반응은 당연했지만, 취재가 엎어진 것 같아 조금 실망스럽긴 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한 참가자가 별도 대화방을 만든 뒤 기자를 초청해 “우리 모임은 숫자가 작으니 더 큰 그룹과 접촉을 하는 게 좋을 것”이라며 회원 1000명이 모인 그룹을 알려줬다. 그곳에서도 명함을 보여주고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 사람과 인터뷰 와중에도 시위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다른 사람의 연락을 받았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도 인터뷰에 응하고 싶다는 몇몇 중국인이 접촉해왔는데, 그들에게 아직 답문조차 하지 못했다.
중국 시위 이면에 숨겨져 있던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10대부터 중년의 시민까지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중국 방역당국의 불합리한 ‘제로 코로나 정책’은 물론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 추모, 언론·집회의 자유, 민주주의 실현까지…. 중국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표현하더라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을 갈망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한 중국 시민은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시위는 긴 시간 중국인들을 억누른 압제에 대한 스트레스가 가혹한 코로나19 규제와 맞물려 폭발한 것이다”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분명히 했다. 대규모 시위에도 그들은 “중국 공산당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계속 싸우겠다는 의지만은 확고해 보였다.
중국인들은 외부의 도움을 절실히 호소했다. 중국 정부가 언론 매체는 물론 소셜미디어까지 통제의 고삐를 죄고 있다 보니, 그들은 고립돼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인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지지를 표시해왔다. 2019년 홍콩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 때도 그랬고, 2021년 발생한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 때도 미얀마 시민들을 응원했다. 이제는 공산당에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중국인이 외롭지 않도록 그들에게 연대의 뜻을 전할 시간이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