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윤 대통령이 못 닦아준 '캄코시티' 눈물
박석호 서울정치팀 부장
부산저축은행, ‘캄코시티’ 투자로 2010년 파산
예금자 3만 8000여 명 아직도 피해보전 난망
윤 대통령 방문에 기대감 커졌지만 관심 못끌어
대통령 순방, 재외국민들 어려움 챙기는 기회로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중심가에서 북서쪽으로 3km가량 이동하자 아파트와 빌라 몇 동이 덩그러니 서있는 드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캄코시티’(Camko City)라는 신도시가 들어설 부지라고 했다. 캄코시티는 캄보디아와 코리아의 앞 글자만 따서 이름을 지었는데, 말 그대로 캄보디아에 건설되는 한국형 신도시다. 40만 평의 부지에 글로벌 비즈니스, 주거, 교육, 레저, 쇼핑 등 모든 인프라를 갖춘 미래형 신도시를 꿈꿨지만 지금은 방치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순방을 동행 취재한 기자는 첫 일정인 ‘ASEAN+3’ 정상회의가 열리는 캄보디아에 지난달 11일 도착했다.
기자가 찾은 캄코시티 현장은 윤 대통령의 정상회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10여 년 전 우리나라를 뒤흔들었던 대형 금융 피해사건, 이른바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거대한 땅에 예금을 돌려받지 못한 우리 피해자 4만여 명의 눈물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한국인이 세운 ‘월드시티’라는 현지 개발사는 2005년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2369억 원을 대출받아 캄코시티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분양 실패 등으로 사업은 좌초 위기에 놓였고, 2010년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부산저축은행은 캄코시티를 포함한 감당 못할 수준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투자로 파산하고 만다.
예금보호제도(5000만 원) 범위를 초과한 예금자들은 피해금액을 돌려받지 못했다. 후순위 채권 투자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모두 3만 8000여 명에 달했다. 우리 정부는 예금보험공사가 부산저축은행의 채권을 인수해 피해 보전에 나서도록 했다. 하지만 책임을 져야 할 월드시티가 오히려 소유권과 개발사업권을 주장하면서 예보의 채권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캄보디아 법원에 냈고, 예보는 1심에서 패소했다.
다행히 2019년 3월 문재인 대통령과 훈센 캄보디아 총리 간의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고, 이후 양국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에 따라 예보는 캄보디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그렇지만 캄코시티 채권을 처분해 국내 피해자들에게 돌려주는 과정은 아직 험난하다. 예보는 캄코시티가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 정보와 경영현황을 파악해 현재의 자산가치를 평가하고 이를 매각해야 하지만 양국 협력이 또다시 지지부진한 것이다.
캄보디아 교민들은 이번 윤 대통령의 방문에 맞춰 두 나라 사이에서 실질적인 논의가 진전될 것을 기대했다. 일부 교민은 윤 대통령 동선을 따라다니면서 ‘살려주십시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고, 윤 대통령이 주재한 동포간담회에서 현지 교민들의 민원으로 건의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대통령실도 양국 정상회담과 경제협력, 기업인 지원 등에 초점을 맞췄지 부산저축은행 사건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2010년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있으면서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 사건 주임 검사를 맡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교민들에게는 더욱 아쉬운 기회였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현지 브리핑에서 부산저축은행 피해자 구제를 위한 교민들의 요청에 대해 “정상 외교나 이런 데서 언급이 될 내용인지…, 그런 부분은 아닐 수 있겠다고 본다”고 답했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나서면 상대국 정상과의 회담이 가장 먼저다. 이번 아세안+3 정상회의나 G7 정상회의 같은 다자 간 회의에서는 글로벌 의제를 선점하고, 대통령의 이미지 메이킹으로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 나라 간의 경제와 교류 활성화를 위해선 MOU(양해각서) 체결,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 주재, 봉사활동 참여 등 성과가 빛나는 화려한 이벤트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교민들은 현지를 방문한 대통령에게 재외국민을 따뜻하게 챙기는 ‘국가원수’ 역할을 기대한다. 캄보디아를 방문한 윤 대통령은 왜 캄코시티 피해자들과 현지 교민의 딱한 사정에 관심을 보이지 못했을까. 순방을 준비하는 외교부와 현지 공관이 대통령이 돋보이는 행사를 주관하고, 듣기 좋은 보고서를 만드는 데만 초점을 맞춘 결과가 아닐까. 재외국민들이 타향에서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도 해외순방에 나선 국가 최고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다.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