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숲에 갇힌 도시… 사람 중심 건축으로 숨통 틔워라 [新 문화지리지 2022 부산 재발견] 14.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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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화지리지 2022 부산 재발견] 14. 도시와 건축

평지서 산중턱까지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점령
사용자·자연 배려한 수국마을·오륙도 가원 눈길
의미 있는 건축 공간, 도시에 긍정적 에너지 부여
산·바다·강 끼고 있는 부산 정체성 살린 건축을

세대별 다른 주거 공간을 선보인 모여가 주택은 새로운 주거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여가 주택 야경 모습. 건축사진가 윤준환 제공 세대별 다른 주거 공간을 선보인 모여가 주택은 새로운 주거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여가 주택 야경 모습. 건축사진가 윤준환 제공

건축 전문가들은 흔히 부산의 도시 건축에 대해 “건축이 가지는 다양성이 많이 결여돼 있으며, 부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없다”고 말한다. 동네마다 용적률과 층수만 조금씩 다를 뿐 건축의 차이를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게 부산의 현주소다. 사각형 틀과 특색 없는 건물들이 도시의 인상이 된 지 오래다. 건물은 줄지어 있지만, 부산이라는 도시 정체성을 담은 건축물을 찾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 이유는 뭘까. 동의대 건축학과 이태문 교수는 “그 중심에 사람이 아닌 물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부산이란 도시 속 건축은 한마디로 산만하다. 해안가는 높은 건폐율과 용적률을 향한 열망으로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주위와의 조화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주변과 단절돼 있거나 서로를 배척한 채 각자의 존재감을 뽐내며 우뚝 서 있다. 건물은 튀기만 할 뿐 배려나 존중은 사라진 지 오래다. 도시 곳곳이 건축주의 욕망이나 자본에 굴복해 버렸다. 아파트 건립으로 학교 통학로가 갑자기 사라지는 게 현실이 됐다. 도시 주거 공간은 새것 바꾸기에 바쁘다. 세월이 조금 흘렀다 싶으면 재개발,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교체된다. 대한민국의 도시라면 비슷하겠지만, 부산은 유독 심하다. 평지에서 산 중턱까지 천편일률적인 아파트가 도시를 온통 잠식해 버렸다. 마치 이쪽에서 Ctrl+c 해서 저쪽에 Ctrl+v해 채워 넣은 느낌이다. 그곳엔 소통 대신 불통이, 접촉 대신 접속만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카페 건축’이 무표정한 도심에 자극제가 되고 있어 반가울 따름이다.


■의미 있는 부산의 건축들

부산에도 잘 찾아보면 깊은 여운과 울림을 주는 건축물이 더러 있다. 대표적인 게 청소년 자립생활공간으로 복지시설의 고정관념을 깬 ‘수국마을’과 폐교를 리모델링해 놀랄 만한 공간 변신을 가져온 ‘알로이시오기지1968’이다. 두 곳 모두 같은 건축사사무소에서 설계했다. 동아대 건축학과 김기수 교수는 “'수국마을'은 중앙에 복도를 두고 옆으로 기숙사를 배치했던 기존의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숙사 유형을 제시해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었고, 10년이 넘게 걸린 프로젝트 '알로이시오기지1968'은 건축주, 사용자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오래된 학교 건물을 완성도 높은 재생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두 작품 모두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건축으로 평가받는다.

부산의 자연과 바다 환경을 활용해 이를 건축물에 잘 녹여낸 것도 있다. 바로 ‘오륙도 가원’이다. 경사진 계곡 아래 움푹 들어간 곳에 탁 트인 바다를 마주하고 앉은 레스토랑이다. 자연이 지닌 지형 지세를 최대한 살리고 거기에 인공의 요소를 최대한 절제하려 애썼다. 안용대(가가건축사무소 대표) 건축가는 “‘오륙도 가원’은 부산다운 건축상에 가장 부합하는 건축물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 풍경 속에 살짝 얹어 놓은 듯 차분하고 안정적이며, 여기에 더해 건축의 세밀함도 놓치지 않아 건축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고 평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키스와이어센터, 크리에이티브센터, 모여가 주택, 레지던스 엘가, F1963, 구 백제병원, 문화골목, 동아대 박물관 등도 건축적 혹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키스와이어센터’는 기업이 가진 것을 지역 사회에 어떻게 잘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과 그 방향성을 잘 읽어낸 건축물이다. 기장의 ‘임랑문화공원(박태준기념관)’이나 영도의 ‘아레아식스’도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 ‘F1963’이나 ‘구 백제병원’ ‘동아대 박물관’은 과거 건축자산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구 백제병원은 개인, 동아대 박물관은 사적재단, F1963은 민간 기업이 각각 소유하고 있지만, 모두 도시가 가진 정체성을 계속 이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의 빛’ 같은 존재다.

세대별로 각기 다른 모양을 보여준 ‘모여가 주택’이나 세대별 마당이 있는 집을 선보인 도심형 생활주택 ‘레지던스 엘가’는 공동주택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었다. ‘크리에이티브센터’는 전통 건축과 현대 건축의 조화가 빛난다. ‘문화골목’은 쇠퇴해 가는 지역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해 활성화한 경우다. 문화라는 상큼한 공기를 도심 골목에 불어넣었다. 폐건축 자재를 재활용해 향후 부산이 지향해야 할 도시재생의 모델을 제시했다.

문제는 건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이들 건축물이 긴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건축 공간들이 시민의 삶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숨쉬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 건축의 질적 향상 어떻게

앞에서 언급한 건축물 중에는 ‘부산(다운) 건축상’ 수상작이 많다. 2003년부터 시작된 부산 건축상은 올해로 20년째를 맞았다. 수상작만 해도 무려 200작품이 넘는다. 이는 건축상 수상작이 적어도 연평균 10작품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부산 건축상이 부산 건축의 활성화에 기여해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부산 건축상이 존중받고, 높게 평가받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상의 명칭이 변경되고, 선정 과정이나 상의 목적 등의 불분명 때문에 그 권위와 명성은 점점 퇴색하고 있다. 최근 지역의 건축가들이 부산 건축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상의 권위를 높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부산 건축의 질적인 향상을 이루는 일이다. 그래서 이들의 목소리가 반갑다.

김 교수는 “무엇보다 부산(다운) 건축상을 주는 목적이 불분명하다. ‘부산다운’의 개념도 명확하지 않다. 부산 건축상에 금·은·동이 있는데 마치 경기하는 느낌을 받는다. 상을 주는 이도 모호하다. 이게 부산 건축상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요인이다”고 꼬집었다.

부산 건축상의 권위를 세웠다고 해서 곧바로 부산 건축이 질적으로 한 단계 높아지는 건 아니다. 단지 ‘지렛대 효과’는 있다. 이와 맞물러 도시 건축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필요하다. 부산시총괄건축가, 부산건축정책위원회, 부산건축제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도시 건축의 발전을 위한 담론의 장도 활발해야 한다. (주)싸이트플래닝건축사사무소 한영숙 대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건축 담론이 활발했다. 지금은 담론의 장이 잘 보이지 않는다. 부산의 도시 건축을 좀 더 살찌우기 위해서라도 담론의 장이 활발하게 펼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 건축이 나아갈 방향은

세계는 지금 도시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됐다. 건축 등 창의적인 문화 콘텐츠로 도시의 면모를 새롭게 과시하는 도시가 있는가 하면, 자연과의 공존을 부르짖으며 세계 전면에 나서는 도시도 있다. 그 중심에 도시 건축이 있다.

부산의 도시 건축은 부산의 정체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부산이란 도시가 가진 역사와 고유한 문화, 자연 환경적 특성 말이다. “부산은 자연과 바다, 해양의 도시이면서 자연이나 물을 잘 다룬 건축물이 없다. 다만 강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아파트나 건물만 있을 뿐이다.” 김 교수의 지적이다. 산과 강,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의 자연환경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 이제는 부산의 건축이 이를 도시 건축에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일만 남았다. 이를 위해서는 건축가도, 건축주도, 부산다운 건축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

도시의 삶은 근본적으로 함께 살아가기이다. 비좁은 도시에서 삶이 서로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면, 공존하고 배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건축은 바로 이런 관계성을 만들고 구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옛 하야리아 공원의 건물이나 적산가옥, 영화관 등 도시의 기억이나 정체성을 마구잡이로 지워버리는 어리석음은 이제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부산의 도시 건축이 좀 더 건강해지려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건축, 친환경적인 건축도 필요하다. 더불어 도시 건축은 인간적인 커뮤니티가 성장하는 곳으로 도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도시의 입장에서 보면 개별 건축물의 진화는 도시 발전의 작은 움직임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게 지속적으로 모이고 확장되면 도시 이미지를 바꾼다. 동명대 이승헌 실내건축학과 교수는 “잘 만들어진 건축 공간은 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좋은 에너지를 보급하는 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부산 도시 건축, 이제 변할 때다.

특별취재팀=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사진 제공=부산시청·기장군청·부산건축제

그래픽=비온후 김철진 대표 beonwhobook@naver.com

부산일보사·부산문화재단 공동기획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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