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찍는 시험” “학원 분반용 자료”… 뒤틀린 학업성취도 평가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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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수 교육감 공약 1호 학업평가
성적 반영 안 돼 동기부여 한계
10분 만에 시험 끝내고 자기 일쑤
학원선 줄 세우기 위한 자료 악용
교육청 부작용 알지만 대책 없어

10월 부산의 한 학교에서 학업평가가 시행되는 모습. 부산일보DB 10월 부산의 한 학교에서 학업평가가 시행되는 모습. 부산일보DB

부산 A 중학교 김 모 교사는 지난달 학교에서 처음 치른 맞춤형 학업성취도 자율평가(이하 학업평가) 시간을 잊을 수 없다. 컴퓨터 기반 평가(CBT)로 컴퓨터실에 모인 학생들은 시험 시작 10분 정도가 지나자 하나둘씩 엎드리기 시작했다. 시험 시작 전 평가가 내신에 들어가는지, 생활기록부에 남는지 묻는 학생들에게 자율평가의 취지를 설명하자 “대충 찍고 자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김 교사는 “자신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러 차례 지도했지만 학생들 입장에선 중간, 기말 시험도 아니니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는 평가가 돼 버렸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최 모(44·부산 수영구) 씨는 최근 아이의 중1 선행학습 수학학원을 알아보기 위해 학원에 상담을 하러 갔다. 학원에서는 아이의 학업평가 성취도를 적어 달라고 했다. 학원에서는 성취도를 기준으로 학생들을 분반하고 있었다. 최 씨는 “시험을 치고 온 아이가 난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말에 학원이라도 보내 볼까 해서 갔는데, 학원에선 이미 줄 세우기를 하고 있어 아이가 더 좌절할까 걱정이다”고 말했다.


하윤수 부산시교육감의 1호 공약이자 학력 신장 대책의 일환으로 올 10월 도입된 학업평가에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고학년 학생들에게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저학년은 평가 결과가 학원 등록 성적표로 쓰이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교육감 공약 1호로 취임 3개월 만에 도입된 평가에 사전 운영 검토가 부족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2일 부산시교육청에 따르면 10월부터 부산 지역 초·중·고교에서 희망 학교에 한해 초6, 중3, 고2를 대상으로 학업평가가 치러지고 있다. 10월부터 이달까지 1차 시험, 이달부터 내년 2월까지 2차 시험이 시행된다. 학교 자체적으로 컴퓨터나 태블릿PC 등으로 교육과정평가원 평가 시스템에 접속한 뒤 선택한 교과목을 응시한다. 고등학생은 국어·영어·수학, 중학생과 초등학생은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등 5과목을 치른다. 시험 성적은 과목별, 세부 역량별 성취율을 1~4 수준으로 나눠 표시된다. 성취율은 전체 문항 수 대비 정답 문항 수 비율이기 때문에 대략적인 점수화가 가능하다.

학생 스스로 자신의 학업 수준을 돌아보고 보완하는 것이 평가 취지지만, 도입 3개월을 맞은 학교 현장에서는 ‘속 빈 강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중3, 고2의 경우 학교 내신, 생활기록부 등에 반영되지 않는 평가 특성상 학생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데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B 중학교 박 모 교사는 “시험 범위가 직전 학기까지인데 아이들 입장에서는 지금 내신 범위도 아니니 더욱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경우 학력평가가 학교 생활에서 치르는 유일한 시험인 상황에서 사교육 등용문으로 인식되는 현상도 자연스레 빚어진다. 공교육 내에서 ‘성적 줄 세우기’가 사라졌고 학력평가 취지가 줄 세우기는 아니지만 학원가 등에서 암묵적으로 성적 서열화가 일어나는 실정이다. 내년 초3부터 고2까지 전면 시행 전 평가 제도 운영에 대한 점검과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C 초등학교 이 모 교사는 “학원가에서는 학력평가로 자체 줄 세우기를 하고 있고 아이들끼리도 공부 잘하는 애, 못하는 애로 서로 인식하고 있다”며 “한 번뿐인 시험에 아이들이 좌절하기도 한다. 결국 학부모 입장에서는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육청은 부작용을 인식하고 있지만 뚜렷한 대응책을 마련할 수 없어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학력 신장 공약 이행의 수단으로 학력 평가가 시행됐지만, 평가원이 자료를 관리하는 탓에 교육청은 시행하는 학교가 몇 곳인지, 학생 수준은 어떤 상태인지 제도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평가 참여 역시 학교 자율에 맡기고 있어 자칫 평가 과정 개선이 평가를 강제하는 것으로 비칠 우려도 있다.

부산시교육청 관계자는 “현장 교사들에게 운영 팁을 제공하고 학부모 대상 공청회 등을 통해 운영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학교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평가 이후 재학습을 할 수 있는 AI 프로그램도 개발해 학생 스스로 주도적 학습을 최대한 장려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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