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 창업주 생가 탐방] 재벌집 아들은 알았을까, 할아버지의 깊은 뜻
남강 '솥바위' 반경 20리에 삼성 LG 효성 창업주 탄생
의령 삼성 이병철 생가, 사랑채 앞 우물 마을 주민에 개방
진주 지수승산마을 LG 구인회·GS 허만정 생가 등 10여 채
허준 선생 유언비 등 곳곳에 나눔 정신 묻어나
인근 함안엔 효성 초홍제 회장 생가. 자작농 육성 노력
묵은 해가 저물고 있다. 새해엔 몸도 마음도 좀 더 풍요로워질까. 부자(富者)되기를 소망하는 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동네가 경남에 있다. 의령군과 함안군, 진주시를 가로지르는 남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솥바위’가 그 중심이다. 조선 후기 한 도인이 ‘솥바위 반경 20리(8km) 안에 큰 부자 셋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인근에서 삼성 이병철 회장, 금성(LG·GS) 구인회 회장, 효성 조홍제 회장이 탄생했다. 대기업 창업주가 나고 자란 마을에는 과연 솥바위의 상서로운 기운이 흐르는 것일까. 부자의 기(氣)를 받으러 찾아간 이들 생가에서, 돈보다 중요한 걸 배우고 돌아왔다.
■천석꾼의 나눔과 베풂
솥바위에서 자동차로 15분, 직선거리로 북쪽 8km 떨어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선생의 생가가 자리한다. 이달 중순 찾아간 마을 입구엔 선생의 손자인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의 취임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부자분식점, 부자매점, 부자벽화 등 ‘부자 글자’ 세례를 받으며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자 흙 담장 동판에 ‘호암 이병철 선생 생가’라고 새긴 기와집이 등장한다. 1910년 이병철 회장이 태어난 이 집은 1851년 그의 조부께서 1907㎡의 부지에 손수 지었다. 안채·사랑채·대문채·광채로 이뤄졌는데, 호암재단은 2007년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일반인에게 전면 개방했다. 보수 과정에서 기와를 새로 얹고, 지금의 화단 자리에 있던 아래채는 사라졌다.
원형에서 조금 달라졌지만 170년 넘은 고가의 기운은 여전하다. 담장 아래와 화단 등지엔 옛 기와가 쌓여 있고, 광채 안에는 ‘천석지기’ 집안을 엿볼 수 있는 마지막 농기구도 전시돼 있다.
호암 생가의 특징은 우물이 2개라는 점이다. 하나는 안채 앞(안 우물), 하나는 사랑채 앞(바깥 우물)에 있다. 물이 귀했던 시절, 대문을 활짝 열어 동네 사람들과 바깥 우물을 나눴다고 한다.
경상남도 안병섭 문화관광해설사는 “호암 선생 집안은 정곡면·유곡면·지정면까지 농토가 있었는데, 소작농의 아이가 태어나면 미역과 쌀을 갖다 주고 마을 사람들이 결혼하면 옷 세 벌을 선물했다”며 “풍수뿐만 아니라 베풂 덕분에 선생 집안이 더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호암 생가는 곳곳에 작은 볼거리가 있다. 생가 동쪽, 거대한 바위 벽을 자세히 보면 거북이와 두꺼비, 떡시루 모양의 돈다발 등 여러 형상이 있어 ‘부자 기바위’라 불린다.
4남매 중 막내였던 이 회장은 열일곱에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박두을 여사와 결혼하면서 앞집으로 분가했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다. 분가해 살던 집은 재벌 총수가 된 뒤 크게 다시 지어 생전에 자주 이용했고, 최근에는 이재용 회장도 묵었다고 한다.
생가 구경만으로 아쉽다면 마을 공영주차장(부자주차장)에서 시작하는 ‘부자길’도 걸어볼 만하다. A코스(6.3km)로 방향을 잡으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탑바위’와 임진왜란 의병의 기운이 서린 ‘호미산성’ 등을 만나 볼 수 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려면 의령 특산품이 제격이다. 팥소를 넣은 떡을 망개잎으로 싼 망개떡과 시골장터 맛 그대로인 소고기국밥이 유명하다.
■마음이 더 부자인 마을
호암 생가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 남쪽으로 달리면 제대로 ‘부자마을’이라 부를 만한 동네가 나온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지금의 LG·GS그룹을 일군 능성 구씨와 김해 허씨가 모여 사는 승산마을이다. 두 집안이 이웃사촌이자 사돈을 맺으며 300년 넘게 사이좋게 살아온 이 마을은 LG그룹 공동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1907~1969)과 효주 허만정 선생(1897~1952)이 태어나기 전부터 유명했다.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부자마을로, 구한말에 만석꾼 2가구, 천석꾼은 14가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초입에서 시작해 골목을 거닐면 LG·GS그룹 기업인의 생가와 본가, 재실 등을 연이어 만나게 된다. LG 구인회 회장 생가, 구 회장의 처가인 허선구 고가, 효주 허만정 본가, 창강정(능성 구씨 대종중 재실), 창애정, 허순구 생가(삼성 이병철 회장 누님댁), 지신고가(허준 생가) 등이 실개천을 따라 이어진다. 마을 앞으로는 지수천이 흐르는데, 풍수에서 돈을 뜻하는 물길이 2개나 마을을 지나는 셈이다.
아쉽게도 현재 구 회장 생가를 비롯해 대부분의 고가는 두 가문에서 관리를 하면서 일반인에겐 공개하지 않고 있다. 대신 진주시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하면,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마을을 구석구석 돌며 구씨 허씨 일가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우연히 관리인을 만나면 잠깐이나마 대문을 열고 내부를 구경해 보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
승산마을은 대문 바깥에서 배울 점이 더 많다. ‘만석꾼의 집(작은 승지 허만진 댁 옛터)’ 이정표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기괴한 모양의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허씨 가문의 나눔 정신을 상징하는 ‘승산마을 금강산’. 허만진 선생은 춘궁기 형편이 어려운 마을 사람들에게 방어산의 돌을 자신의 집 앞마당으로 옮기도록 하고 그 노동의 대가로 곡식을 나눴는데, 하나둘씩 쌓인 돌이 지금의 금강산 형상이 됐다고 한다.
효주 허만정의 아버지인 허준 선생이 노년을 보낸 ‘지신정’ 입구에 세워진 ‘허씨 의장비’의 사연도 예사롭지 않다. 선생이 77세 되던 1920년, 자신의 재산을 가족·조상·이웃·국가와 고루 나누도록 한 유언이 비석에 기록돼 있다. 마을 한가운데 허만정 선생의 호를 딴 ‘효주원’은 6남 허승효 회장(알토전기)이 어머니 유언에 따라 2006년 주민들을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마을관광안내소가 있는 K-기업가정신센터(옛 지수초등학교) 1층 전시실에는 승산마을의 유래와 구씨 허씨 일가에 대한 이야기가 잘 정리돼 있다. 센터의 전신인 지수초등학교는 LG 구인회 회장을 비롯해 60여 명의 기업인을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삼성 이병철 회장도 이 마을로 시집온 누님댁에서 한동안 지내며 구 회장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건물 앞에는 구 회장과 이 회장, 효성 조홍제 회장이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는 ‘부자소나무’가 10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친 김에 승산마을에서 서쪽으로 20분쯤 가면 ‘태극기마을’로 불리는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신창마을이 나온다.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대문채·별채·사랑채·안채·광채 등으로 구성된 생가는 몇 년 전 개보수를 거쳐 2019년 11월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조 회장의 5대 선조부터 터를 닦은 이 집은 여느 창업주 생가와 달리 들판 한가운데 있다. 사랑채가 남부지방 부잣집의 전통양식인 ‘일자형’이 아닌 ‘겹집 구조’인 점도 특징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직접 물을 데우는 ‘가마솥 목욕탕’도 이색적이다.
안채 옆 조 회장이 신혼 생활을 했던 별채는 한국전쟁 이전에 화재로 소실돼 터만 남았고, 지금의 별채는 1985년 사랑채 옆에 새로 지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과 동업하다 1962년 뒤늦게 독자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조 회장은 스스로를 만우(晩愚·늦되고 어리석다)라 칭했다. 일제강점기 군북금융조합장을 지낸 그는 조선인의 토지를 지키고 자작농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광채 안에는 당시 기록을 토대로 한 공간이 꾸며져 있다. 안기환 만우생가 관리소장은 “17세까지 한학을 배워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던 회장님의 성격과 선비 정신이 사업 방식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고 설명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