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염치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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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화 수필가

내로남불·무책임 횡행하는 정치권
부끄러운 마음 없는 세태 부추겨
회생 변화 거듭남은 염치에서 출발
국가 국민 모두 부끄러움 알아야
지금은 위로와 희망의 등불 켤 때

우상호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특조위원들이 12월 2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 조사에서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의 브리핑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우상호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특조위원들이 12월 2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 조사에서 최성범 용산소방서장의 브리핑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 마포구에서 20년 이상 맥줏집을 운영하던 50대 자영업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영난을 더 견딜 수 없어서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살던 원룸을 정리해서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을 주었다. 그것이 사장으로서의 도리라 생각했다. 가게 유리창에는 도시가스 공급을 중단한다는 통지문이 붙어 있었다.

이 뉴스를 보며 나는 ‘염치’를 떠올렸다. 염치란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쳤을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과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과 고마움 때문에 그냥 떠날 수가 없었을 게다. 가게 문 아래에는 누군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 다발이 그의 넋을 달래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내가 먼저 아는 게 염치다. 염치의 치(恥)는 귀 이(耳)와 마음 심(心)을 합한 글자다. 자신의 마음 소리를 자신의 귀가 먼저 듣고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로 짐작된다.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저 ‘패널’에게 과연 염치라는 게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특수 임무를 띠고 투입된 용병처럼 현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기 위해 온갖 궤변을 늘어놓는다. 심지어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진 문제를 두고도 정치적 보복이라 우긴다. 저절로 분노 게이지가 올라간다.

여권의 분위기는 또 어떠한가. 당권 경쟁에 눈먼 자들이 수시로 불협화음을 내는가 하면, 범퍼카를 탄 아이들처럼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민들로 하여금 누구의 범퍼카가 뒤집혔는지 구경이나 하라는 건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 주무 장관이란 자가 했던 말도 잊을 수 없다. “소방, 경찰 인력을 배치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어야 옳지 않나. 이들의 ‘염치 소재지’도 궁금하다.

상당히 많은 20대가 ‘10억이 생긴다면 잘못을 저지르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응답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취업이 안 되고 앞날이 불투명하다 보니 한탕주의에 빠져든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도덕과 윤리의식마저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닌지. 젊은이들이 돈 10억에 무너져 내린다면, 그동안 기르고 가르치고 밥상머리 교육을 시켜 온 부모의 공은 어디에서 찾나. 아무리 현실이 막막하다 하더라도 ‘염치불고(廉恥不顧)형’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 염치가 없으면 이내 상스러워진다. 그런 사람은 처신에 있어 못 하는 게 없고 안 하는 게 없다. 염치는 인간의 근본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염치가 있어야 잘못을 하더라도 회생의 기회, 변화의 기회, 거듭남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요즘 매스컴에서 들려오는 낱말들은 거의 어둡다. 파행, 결렬, 파업, 탄핵, 참사, 깡통전세, 탄도미사일, 대선자금 저수지 등. 우리가 서로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하지만, 실은 그 누구도 안녕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사회, 경제, 정치, 외교, 민생, 어느 분야든 다 어렵다. 어쩌면 이 나라가 ‘다발성 장기 손상 환자’가 된 게 아닐까 싶다. 대다수의 국민이 현 정부에 바라는 것은 ‘많이 아픈 대한민국’을 어떻게든 치료하라는 게 아닐까.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우선 노동개혁, 연금개혁, 교육개혁에 집중하겠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줄탁동기’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가 안팎에서 동시에 쪼아야 한다는 의미다. 나라의 앞날을 정부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우리 국민도 힘을 보태야 한다. 무엇보다 염치를 되찾았으면 한다. 체면을 생각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 사회를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리라 믿는다.

유난히 길게 느껴진 한 해였다. 그만큼 힘들었고, 애태웠고, 종종걸음을 했다는 얘기다. 서로의 부은 발등을 어루만져 주며 올 한 해 잘 버텼다고 위로할 때다.

지금 겨울 한파가 몰아치고 있지만 갯버들은 이미 움 틔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게다. 우리의 봄도 그렇게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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