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우리 삶의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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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 부산일보DB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 부산일보DB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를 만났다. 삶과 사랑이 죽음과 맞닿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느닷없이 찾아온 질병으로 파탄에 이른 노년의 삶과 죽음으로 완성하는 사랑에 오랫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이듬해 부산시향 공연에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초청했다. 아마도 리허설 시간이었을 것이다. 백건우의 아내이자 배우 윤정희와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더니 마치 대사를 읊조리듯 제목을 되뇌었다. “아무흐(amour).” 프랑스어로 사랑이라는 뜻이다. 아무르가 아닌 아무흐에 가까웠던 발음은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아픔과 삶의 심연을 파고드는 듯했다. 당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그녀의 삶을 응축한 듯한 ‘아무흐’가 자아내는 짙은 여운을 잊을 수 없다.

끌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1966)는 청춘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영화다. 로맨스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던 이 영화는 사랑과 인생을 노래한 대서사시로 갈무리되었다. 개봉한 지 53년 만에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2019)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과 여: 20년 후’(1986)가 있으니, 3부작인 셈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주인공은 안느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큼은 오롯하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당신과의 오십 년 전 그날이 바로 어제 같군. 우리 사랑하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 생애 최고의 날이겠지.” 기억의 곳간에 묻어두고 꺼내보는 청춘의 사랑은 화양연화가 아니었으랴.

35세에 ‘남과 여’에 출연했던 장 루이 트린티냥은 ‘아무르’에서 남편 조르주 역을 맡았다. 82세였다. 주름진 얼굴과 힘겨운 걸음걸이에서 야속하게 흘러버린 세월을 읽는다.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된 아내 안느는 존엄성을 상실한 삶을 더 이상 지속하고 싶지 않다. 조르주는 기어이 자신의 손으로 안느의 고통을 끝낸다. 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노년의 저미는 사랑과 도저한 사랑의 방식이 이토록 무거울 수 있단 말인가. 트린티냥은 올해 6월, 85세에 안느 역을 맡았던 엠마누엘 리바는 2017년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 만인의 연인이었던 배우 윤정희는 파리에서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다. 그녀의 아무흐는 지금 어디쯤 가닿고 있을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이다. 우리 삶의 화양연화가 언제였던가를 생각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 삶이 꽃이 되는 날들 말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글 한 편, 노래 한 곡, 영화 한 편이 우리를 위로하고, 곁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머무는 이날들이 바로 화양연화가 아닐까. 가장 빛나는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리라. 2023년에도 내내 산다.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 만남과 이별,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이 함께하는 모든 날들이 아름다운 한때로 피어나는 화양연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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