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보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4. 새 시대 신여성, 천경자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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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고 기운찬 여성의 ‘단장’, 배호의 노래 들으며 그린 ‘누가 울어2’

천경자 '누가 울어2'(1989,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서울특별시 천경자 '누가 울어2'(1989,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서울특별시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천경자-


한국화단이 낳은 걸출한 작가 중 한 명인 천경자는 채색화로 독보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전통적 한국화의 범주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화가인 천경자는 그림 솜씨뿐만 아니라 글쓰기에도 능했다. 그는 여러 권의 수필집도 펴내며 대중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작가였다.

천경자의 작품은 화려하면서 신비한, 환상적인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세련된 색감, 정교한 붓질이 어우러져 캔버스 화면 위에 미묘한 감수성을 뽐낸다. 이는 보수적이던 한국 사회에서 자신만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갔던, 화려하면서도 고독한 삶을 살았던 천경자의 개인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천경자(1924~2015)는 전남 고흥군 출생으로 본명은 천옥자다. 금이야 옥이야 키우겠다는 뜻으로 옥자로 이름 지어졌으나, 이후 본인이 직접 이름을 지어 ‘천경자’로 개명했다. 천경자는 1941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했다. 1943년과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달아 입선하며 작가로서 기량을 뽐냈다.

1944년 귀국한 천경자는 모교에 미술 교사로 부임하고 첫 개인전을 치렀다. 여러 차례 개인전을 통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 당대의 여성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일본화풍의 영향을 받은 채색인물화를 자주 그렸으나, 해방 이후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기 위해 새로운 화풍을 모색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자전적 요소를 담은 도상을 화면에 등장시키며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1970~1980년대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미주 등을 여행하며 자신이 눈에 담은 이국적 풍경과 여성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천경자 '단장'(1950년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서울특별시 천경자 '단장'(1950년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서울특별시

‘수집: 위대한 여정’전에 출품된 천경자의 작품은 2점으로, 1950년대 초기작과 1989년 작가가 65세가 되었을 때 제작된 작품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컬렉션인 ‘단장’은 여성이 단장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일반적인 여성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작지만 강렬한 에너지를 뽐낸다. 단장을 하는 인물은 청아하고 가녀린 여성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성의 붉게 물든 뺨에서 느껴지는 상기된 기운은 인물의 단단한 체구와 어우러져 마치 전쟁에 나가 싸우기 위해 몸을 단장하는 ‘장군’처럼 보인다. 여성의 단호한 표정과 머리를 만지는 모습 또한 사뭇 진지하다. 가냘픈 여성이 아닌, 당당하고 기운찬 여성의 단장을 그린 작품은 한국화단에서 보인 단편적인 여성이 아닌 능동적 주체로서 여성을 묘사한 색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누가 울어2’는 미국 중서부 여행을 마치며 그린 작품이다. 그가 약 65세일 때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며, 화단에서 일가를 이룬 작가의 밀도 있는 화면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랑의 애절함을 담은 배호의 노래를 너무 좋아한 천경자는 작품을 제작할 때 ‘누가 울어’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작업을 했다고 알려지며, 이후 노래 제목을 시리즈 작업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전라의 여성은 관능적으로 보이나, 우수에 젖은 눈빛에서 고독과 우울한 정서가 느껴진다. 이와 함께 화면에는 다양한 도상이 배치되어 있다. 카드는 승패를 상징한다. 테이블 위에는 광대가 그려진 조커 카드가 놓여 있으나, 카펫에서 여성과 함께 쉬고 있는 강아지는 하트를 물고 있다. 작업이 잘될 때는 ‘클로버’, 우울할 땐 ‘스페이드’를 그려 넣었다는 천경자의 인터뷰를 생각해보았을 때, 이는 작가가 이끌어왔던 뜨거운 사랑, 열정을 뜻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뒤쪽 풍경을 가로지르는 코끼리 무리 위에 올려진 보따리 짐과 몸을 굽인 채 울고 있는 여성의 모습은 그치지 않는 고독을 견디는 작가 자신의 또 다른 내면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화려한 삶의 이면에 있는 아픈 개인사와 지난날에 대한 회고를 담은 작품이라 특히 제작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경미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정리=오금아 기자)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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