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파의 생각+] 아파트 이름 순화의 필요성과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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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공모 칼럼니스트

최근 아파트 이름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아파트가 있는 지역과 특징, 건설사와 브랜드, ‘펫네임(pet name)’이라 부르는 개별 단지의 별칭까지 쓰다 보니, 이름이 10글자를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아파트 단지명의 평균 글자 수는 1990년대 4.2자에서 2019년 9.84자로 길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전국에서 이름이 가장 긴 아파트는 무려 25글자에 달했다.

게다가 이 긴 이름을 한국어,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을 조합하여 만들다 보니, 아파트 이름의 의미를 짐작조차 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빛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루체(luce)’와 집을 뜻하는 독일어 ‘하임(heim)’을 조합해 ‘루체하임’을 만들어 내는 식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와 같은 국적 불명의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점점 길고 복잡한 외래어 명칭 난무

최근 한 지자체, 개선 토론회 개최

쉬운 우리말 사용 땐 혜택 등 고려

적합한 명칭 추천도 검토해 볼만

‘우리 집인데 주소를 못 외운다’라거나 ‘서류 주소의 기입란이 모자라 아파트 이름을 다 쓸 수 없다’는 말이 농담만은 아닌 것이다. 또 서울시민 100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0% 이상이 아파트 이름이 어렵고 비슷해 집을 찾는 데 헷갈린 경험이 있고, 외국어 이름이 어렵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서울시가 지나치게 길고 어려운 아파트 이름 대신 알기 쉽고 간단한 이름을 쓰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지난달 29일 ‘알기 쉽고 부르기 쉬운 공동주택 명칭 관련 토론회’를 시작으로 2~3회 더 토론회를 열어 의견을 청취한 뒤 아파트 작명 지침과 중장기 정책을 마련한다고 한다.

부산도 서울과 사정이 다르지 않다. 특히 ‘센텀시티’, ‘에코델타시티’와 같이 지역명이 외국어로 되어 있어 아파트 이름 전체가 외국어로만 작명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따라서 부산도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 논의를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파트 이름을 짓는 데까지 지자체가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반대 의견도 있다. 민간 기업에서 상품성을 고려해 이름을 짓는 것까지 지자체가 관여하는 것은 불필요한 규제를 만드는 일이며, 외국어 남용이 문제라면 아파트 이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상품이 해당된다.

그럼에도 지자체에서 아파트 단지 작명에 관여해야 하는 이유는 아파트 단지 명칭이 ‘공공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명칭은 그것이 곧 지명으로 사용된다. 가령 버스정류장 등이 아파트 단지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아파트 단지 이름이 지명으로 사용되면 공공성을 획득하므로 지자체는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을 마련할 근거가 있다.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 마련이 외래어, 외국어를 아파트 명칭에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어만 사용하고 다른 외래어, 외국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파트 단지 이름의 글자 수를 제한하는 규제도 바람직하지 않다. 몇 글자 이상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 이름이 12글자 이상이 되면 안 된다는 규제를 만들었을 때, 12글자가 기준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11글자는 허용되고 12글자는 안 되는데 11글자와 12글자의 차이는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아파트 명칭에 대한 정책은 ‘규제’의 측면에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규제라는 채찍보다 당근에 해당하는 ‘보상’의 관점에서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울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건축, 재개발 과정에서 쉬운 우리말 이름을 지을 경우 다양한 혜택을 주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지자체에서 아파트 건설 지역과 관련된 옛 지명, 방언, 문화 등에 대해 조사하고 정리해 적합한 명칭을 추천하거나 상표권 등록 절차에 대한 행정 지원을 해 주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항간에 아파트 이름을 길고, 어렵게 짓는 이유가 시어머니가 아들 집을 찾아오기 어렵게 하기 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집을 찾기 어려우면 시누이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다. 아파트 이름을 외국어로 길고 복잡하게 짓는 이유는 그래야 아파트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가격 상승이라는 욕망에 취해 지금처럼 외국어를 남용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말은 설 자리를 잃고 사라지게 될 수밖에 없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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