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역동성’ 전북 남원·장수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깨어나는 가야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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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가야사] 11. 호남 동부 가야

운봉고원의 5세기 후반 수장층의 고총 40기가 밀집해 있는 사적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전경(가운데 구릉). 가야고분군추진단 제공 운봉고원의 5세기 후반 수장층의 고총 40기가 밀집해 있는 사적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전경(가운데 구릉). 가야고분군추진단 제공

5세기~6세기 중엽 호남 동부 가야는 가야연맹의 최대 범위를 드러내는 ‘가야 역동성’의 또렷한 표현이다.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를 아우르는 가야의 당대 판도를 보면 가야 동쪽은 가야 신라 왜가, 가야 서쪽은 가야 백제 마한이 서로 부딪히고 간섭·혼재하고 있었다. 가야가 동쪽으로 왜에 진출해 일본열도 고대사를 자극하고 형성했다면, 서쪽으로는 호남 동부에 역동적인 공간을 창출했던 것이다.

백제·마한 권역으로 알려진 호남에 가야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의외다. 이런 사실이 드러난 것은 2000년대 이후다. 고대사 안쪽은 그만큼 풍부하고 칼로 무 베듯이 쉽게 규정되는 게 아니다. 6세기 전반까지 백제가 호남을 완전히 ‘직접’ 장악하기 전까지 호남에 마한이 따로 존속한 것도 그렇다. 마한은 독자적으로, 백제의 간접 지배 아래 존속했다.

가야가 150년 이상 호남 동부에 세력을 형성한 곳은 2개 권역이다. 전북 남원시 동부인 운봉고원(운봉읍과 인월·아영·산내면)과, 전북 장수권이 그것이다. 전자는 남강 수계, 후자는 금강 수계이지만, 둘은 지리상 남북으로 근접해 있다. 가야 세력과 문화는 운봉고원에 먼저 들어간 뒤 장수권으로 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남 동부에 가야 세력·문화의 유입은 교역이나 가야 유민의 이주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호남 동부 가야의 출발이, 400년 고구려 남정 이후 격동의 5세기라는 점에서 가야 유민의 이주가 유력하게 점쳐진다. 다산 정약용은 “운봉고원은, 이를테면 영남과 호서가 접맥하는 추풍령 같은 ‘영호남 최고의 길목’”이라고 했다. 가야 유민이 백제·마한 세력의 상대적 공백지대인 영호남 최고의 길목으로 뻗어나간 것이었다.


운봉고원과 장수권에 자리를 튼 가야 세력은 만만찮았다. 운봉고원에 44곳(180여 기), 장수권에 45곳(240여 기)에 이르는 가야고분군이 밀집해 있다. 운봉고원의 경우, 청계리 고분군→월산리 고분군→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으로 세력 중심이 이동하면서 강력한 수장층을 형성한 양상을 보인다. 이 중 5세기 후반 수장층의 고총 40기가 있는 사적 ‘유곡리와 두락리고분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된 곳이다. 월산리 고분군에서는 최상급 위세품인 5세기 후엽 중국산(産) 청자 계수호(鷄首壺, 닭 머리 주둥이가 달린 항아리)까지 출토돼 주목을 끌었다.

장수권의 경우는 다시 장수지구(남쪽)와 장계지구(북쪽), 둘로 나뉘는데 5세기부터 유력 집단이 출현하면서 각 지구는 중심과 주변으로 위계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른바 ‘전북 가야’ 2개 권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첫째는 2개 권역을 따로 나눠 ‘운봉가야’ ‘장수가야’로 칭하는 것이다. 세부적으로 차이점을 보이기 때문이다. 북쪽 ‘장수가야’의 경우 마한 재지 문화가 상대적으로 짙다면, 남쪽 ‘운봉가야’의 경우 5세기 초반부터 소가야 문화가 상당히 짙다. 그래서 초기 ‘운봉가야’를 소가야 권역으로 본다. 소가야 권역의 남강 수계(최고 상류)라는 지리적 요인이 초기 운봉가야의 성격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둘째는 2개 권역을 한데 묶어 ‘기문국(己汶國)’으로 보는 시각이다. 기문국은 〈일본서기〉 513년, 516년 조에 등장하는 호남 동부의 소국 이름이다. 청자 계수호, 금동신발, 철제솥, 청동거울 등의 최고급 위세품이 나온 호남 동부 가야에 ‘기문국’이란 유일한 역사적 전거가 합당하다는 것이다.

5세기 들어 부상한 운봉과 장수의 2개 가야는 5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대가야 영역에 편입된다. 바야흐로 대가야는 479년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며 팽창하고 있었다. 당시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격으로 개로왕 전사, 웅진 퇴각 천도에 이어 개로왕 후계인 문주왕과 삼근왕도 2년짜리 왕으로 암살되는 혼란 상황이었다. 대가야는 백제의 혼란을 틈타 호남 동부로 진출해 2개 가야를 장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가야는 대가야 일원으로 편입됐으나 자율적 성격을 지녔다고 본다. 그 자율성에 ‘운봉가야’ ‘장수가야’, 또는 ‘기문국’이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호남 동부에서 빠뜨릴 수 없는 예민한 곳이 남해안 권역의 섬진강 하류(순천·여수·광양)다. 이곳은 해상 거점이었으나 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유력 정치체는 출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은 한반도 남부 세력 판도의 바로미터였다. 4세기 마한문화권에 가까웠던 이곳은 5세기 소가야, 5세기 말~6세기 전엽 대가야 권역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6세기 중엽, 백제 중흥의 무령왕~성왕대에 백제 권역으로 넘어간다. 백제는 일본열도로 향하는 해상 거점을 남해안 권역에서 동진하면서 확보한 것이었다. 대가야의 섬진강 하구 상실은 대가야 위축의 신호탄이었다. 522년 대가야는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으며 활로를 모색했으나 더욱 위축돼갈 뿐이었다.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 당했을 때 호남 동부 가야 중 남쪽의 운봉고원은 신라에 넘어갔고, 북쪽의 장수권은 백제에 넘어갔다. 섬진강 하구는 백제가 가야를 이어 일본열도와 긴밀히 연결되는 해상 거점이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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