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산청 전통주' 맥 잇는 부자(父子) 양조장 [술도락 맛홀릭] <2>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2>산청양조장 '산청약주'와 몬스터빌리지 '소풍' 막걸리

산청양조장의 '산청약주'와 몬스터빌리지의 '소풍' '설레' 막걸리(오른쪽부터). 산청양조장의 '산청약주'와 몬스터빌리지의 '소풍' '설레' 막걸리(오른쪽부터).

가가호호 술을 빚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100년 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급된 지역특산주 면허만 1400건에 이르고, 해마다 새로운 양조장과 전통주가 탄생한다.

전통주엔 지역의 특색이 오롯이 담겼다.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 술을 빚어, 특산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부산일보>는 ‘술도락 맛홀릭’ 기획시리즈를 통해 부울경의 전통주 양조장을 탐방하며 지역의 맛과 가치를 재조명한다. 이지민 대동여주도 대표 등 전통주 전문가도 힘을 보탠다.

산과 물의 고장 경남 산청(山淸)에 가면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아들까지, 3대째 전통을 이어 가고 있는 양조장이 있다. 반백 년 역사의 양조장에서 아버지는 전통 방식을 고집하고, 아들은 바로 옆에 새 양조장을 차려 전통의 틀을 깨려 도전 중이다. 우리 술의 전통과 미래, 신구의 오묘한 조화를 꿈꾸고 있는 이웃한 부자(父子) 양조장을 찾았다.

■父, 전통이 익어 가는 ‘산청양조장’

산청읍내 최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 산청소방서와 길 하나 사이를 두고 사이좋게 자리한 두 개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왼쪽 새 건물은 아버지 김대환(63) 씨가 운영하는 ‘산청양조장’, 오른쪽은 옛 산청양조장 공간에 청년창업가인 아들 김태건(32) 대표가 차린 ‘몬스터빌리지’ 양조장이다.

산청양조장은 공식 기록으로만 50년 넘는 역사를 지녔다. 김 대표의 할아버지가 1971년 인수를 했는데,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훨씬 오래된 셈이다.

재작년 확장 이전을 한 '산청양조장'. 오른쪽 건물이 옛 산청양조장에 들어선 '몬스터빌리지' 양조장이다. 재작년 확장 이전을 한 '산청양조장'. 오른쪽 건물이 옛 산청양조장에 들어선 '몬스터빌리지' 양조장이다.

지난해 가을 산청양조장은 아버지 김 씨의 오랜 바람인 ‘산청약주’를 정식 출시했다. 김 씨가 할머니 어깨너머로 본 옛 방식 그대로 빚어, 지인들하고만 나누던 술이었다. 2021년 지역특산주 약주 면허를 갖추고, 바로 옆 부지에 새 건물을 지어 확장 이전을 하면서 제품화의 길이 열렸다.

김 씨의 할머니 레시피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약재로 유명한 산청의 상황버섯을 넣었다는 점이다. “술은 술다워야지 다른 향이 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저것 첨가해 본 결과 상황버섯의 향이 특출나지 않아 술맛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겠더라고요.”

1990년대 산청양조장 전경. 1971년 김태건 대표의 할아버지가 양조장을 인수할 당시와 같은 위치이다. 산청양조장 제공 1990년대 산청양조장 전경. 1971년 김태건 대표의 할아버지가 양조장을 인수할 당시와 같은 위치이다. 산청양조장 제공
1990년대 산청양조장에서 말통에 술을 받고 있는 김대환 씨. 산청양조장 제공 1990년대 산청양조장에서 말통에 술을 받고 있는 김대환 씨. 산청양조장 제공

MZ세대인 김 대표가 보기엔 산청약주는 아버지의 고집 그 자체다. “일반 막걸리를 빚는 공정도 힘든데, 약주는 몇십 배 더 힘들어요. 대량 생산을 위해 기계의 힘을 빌리는 막걸리와 달리 약주는 60~70년대처럼 직접 짜는 방식을 고집하세요. 그러다 보니 여과도 숙성도 너무 오래 걸려요.”

산청 메뚜기쌀과 청정 지하수로 빚은 산청약주는 주모(밑술)를 포함해 4차례 술을 빚는 ‘사양주’이다. 발효만 한 달 이상, 옛 방식대로 70L짜리 한 통 분량을 짜는 데만 일주일이 걸린다. 이후 100일 동안 저온 창고에서 숙성 과정을 거친다. 다 합치면 수개월이 걸리는 지난한 과정이다.



100일이 지났다고 해서 곧바로 술을 출시하는 건 아니다. 최종적으로 아버지 김 씨의 입맛을 통과해야 한다. 최근 전통주 콘텐츠·유통 플랫폼인 대동여주도와 함께 카카오메이커스에서 진행한 판촉 행사에도 아버지 입맛을 통과해 출고일을 맞추느라 애를 먹었다.

“당도와 산도를 체크했을 때 소수점 단위 차이밖에 안 나는데 아버지는 ‘조금 더 숙성시켜야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막판에 온가족이 동원돼 턱걸이로 출고일을 겨우 맞출 수 있었어요.”

고생스러운 전통 방식을 따르는 대신 김 대표와 아버지는 1년에 세 번만 약주를 빚기로 합의를 봤다. 한 번에 1000병씩 생산하니, 연간 고작 3000병만 맛볼 수 있다.

깊은 정성, 오랜 시간이 담긴 술이어서 그런지 투명한 병에 담긴 산청약주의 영롱한 황금 빛깔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 잔 따라 천천히 들이키자 상황버섯의 은은한 향미가 오랫동안 입안에 맴돈다. 고급진 약주인 만큼 제사상이나 명절 차례상에 제격이다.

옛 산청양조장이자 현 몬스터빌리지의 발효실. 왼쪽에 1970년대에 쓰던 발효조가 보인다. 산청양조장 제공 옛 산청양조장이자 현 몬스터빌리지의 발효실. 왼쪽에 1970년대에 쓰던 발효조가 보인다. 산청양조장 제공
몬스터빌리지의 발효실 발효조에서 '설레' 막걸리용 술이 익어 가고 있다. 몬스터빌리지의 발효실 발효조에서 '설레' 막걸리용 술이 익어 가고 있다.

■子, 새로움이 샘솟는 ‘몬스터빌리지’

학창 시절부터 산청양조장에서 아버지 일을 도운 김 대표는 지난해 큰 도전에 나섰다. 대학 후배 2명과 의기투합해 새 산청양조장 바로 옆, 비어 있던 옛 건물에 따로 양조장을 차린 것이다. 산청양조장의 명성에 기댈 수도 있지만 김 대표는 새로움을 택했다. 본인과 멤버들을 형상화한 캐릭터를 만들고, 양조장 이름도 전통주스럽지 않은 ‘몬스터빌리지’라고 지었다.

몬스터빌리지의 시작은 김 대표가 2019년 제주도에서 열린 ‘양조기술교실’에 참가한 게 계기였다. “진짜 색다른 술이 너무 많고, 온라인에서 술을 팔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신세계였죠. 산청지역에선 저희 술이 판매량이 높으니까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김 대표는 한국가양주연구소와 신라대 우리술 전문인력 양성과정 등을 찾아다니며 전통주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 전통주 입문자를 위한 양조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술 잘 마시는 사람들을 위한 술은 계속 개발되고 잘 팔리는데, 왜 술이 약한 사람을 위한 술은 없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개발한 술이 ‘설레’예요.”

‘저 세상의 달달함을 보여 주겠다’는 각오로 만들었다는 ‘설레’는 라벨부터 핑크색으로 달달함을 물씬 풍긴다. 본인 캐릭터 ‘청산’이 발그레한 볼로 웃고 있는 디자인도 재밌다.

설레가 세상에 나온 지 1년쯤 지난 지난해 12월, 김 대표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소풍’을 출시했다. ‘설레가 너무 달다’는 평가를 반영해 단맛을 줄인 천연탄산 막걸리이다. 설레와 달리 아버지의 막걸리 레시피를 많이 가져와 누룩 대신 입국을 사용했고, 적당한 단맛·신맛·쓴맛을 고루 갖추기 위해 천연감미료도 넣었다. 소풍 전날 기분 좋은 떨림과 소풍 때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는, 행복할 때 마시기 좋은 술이라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알코올 함량을 5.5%로 낮춰 한결 마시기 편한데, 숫자에서 어린이날이 연상된다.

몬스터빌리지의 막걸리 '소풍'과 '설레'. 이재화 PD 몬스터빌리지의 막걸리 '소풍'과 '설레'. 이재화 PD
산청양조장의 '산청약주'. 이재화 PD 산청양조장의 '산청약주'. 이재화 PD

산청양조장과 산청약주에 아들 김 대표의 손길이 더해졌듯, 몬스터빌리지에도 아버지의 노하우가 스며들고 있다. 같은 듯 다른 듯, 따로 또 같이, 부자의 두 양조장은 산청을 넘어 전국으로 이름을 알려 나가고 있다.

지난해 두 양조장은 경사가 겹쳤다. 산청양조장은 산청군 1호로 중소벤처기업부의 ‘백년소공인’에, 몬스터빌리지는 ‘로컬크리에이터’에 선정됐다. 올해는 몇 년 전부터 준비해 온 신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산청양조장은 약주에 소주를 섞어 빚는 ‘과하주’를, 몬스터빌리지는 다양한 도수(19~50도)의 증류식 소주를 선보일 예정이다.

아들의 도전이 걱정이던 아버지도 이제는 응원하는 마음이 더 크다. “술이 발효돼 잘 익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지금의 시간들이 몇 년 뒤엔 아들에게 빛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산청양조장 앞에서 열린 백년소공인 현판식. 현판 바로 오른쪽이 아버지 김대환 씨. 산청양조장 제공 지난해 산청양조장 앞에서 열린 백년소공인 현판식. 현판 바로 오른쪽이 아버지 김대환 씨. 산청양조장 제공
1년 전 양조장스럽지 않은 양조장 '몬스터빌리지'를 설립해 전통주 틀을 깨는 도전과 실험을 이어가고 있는 아들 김태건 대표. 이재화 PD 1년 전 양조장스럽지 않은 양조장 '몬스터빌리지'를 설립해 전통주 틀을 깨는 도전과 실험을 이어가고 있는 아들 김태건 대표. 이재화 PD

■산청의 나물, 전통한정식 맛보려면

깊은 맛을 지닌 산청약주는 전을 비롯해 한국의 전통음식, 달콤한 막걸리 설렘과 소풍은 매운 음식과 잘 어울린다.

산청양조장에서 자동차로 3분, 산청약초시장 인근 춘산식당에 가면 이들 술과 궁합이 맞는 전통한정식을 맛볼 수 있다. 춘산(특)정식의 메인은 산청흑돼지로 요리한 석쇠고추장구이. 3가지 맛이 난다는 ‘삼채’가 결들여져 매콤한 불향 속에 건강한 맛이 느껴진다.

죽순 무침을 비롯해 다양한 나물들 역시 산청에서 자란 것들이다. 가지·깻잎과 함께 나오는 파래 튀김은 모양도 맛도 이색적이다. 산청 메뚜기쌀과 향미찹쌀로 지은 솥밥은 윤기가 흐르고, 장식처럼 섞인 색깔 쌀이 보는 재미도 더한다. 된장찌개에는 논고동과 함께 방아가 들어가 소화를 돕는다.

아쉽게도 일반 식당에선 산청약주나 설렘·소풍을 판매하지 않는다. 대신 산청양조장의 오랜 술인 산청생막걸리와 산청팔도주는 춘산식당을 비롯해 산청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글·사진=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산청 춘당식당의 푸짐한 춘당특정식(4인상). 산청흑돼지로 요리한 매콤한 석쇠고추장구이부터 산청에서 자란 다양한 나물을 맛볼 수 있다. 산청 춘당식당의 푸짐한 춘당특정식(4인상). 산청흑돼지로 요리한 매콤한 석쇠고추장구이부터 산청에서 자란 다양한 나물을 맛볼 수 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