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섭의 플러그인] 말 사라진 국민, 말 넘치는 정치인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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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3년 만에 거리 두기 없는 설날 연휴
가족·친지와 실컷 대화 나누는 기회

하지만 대화 소재는 점점 조심조심
직장·결혼·취직 등 신상 질문 금물

특히 정치 얘기는 더 회피 분위기
반면 정치인 말은 흘러넘쳐 씁쓸

코로나19가 창궐한 지 3년 만에 거리 두기가 없는 설날 연휴를 보냈다. 각자 여건에 따라 마음만 먹으면 예전처럼 가족·친지와 모처럼 얼굴을 맞대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측면과 달리 설날의 의미는 갈수록 퇴색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낀다. 설날 풍경이 예전만 같지 않다는 말은 이미 꽤 됐지만, 이제는 연중 통과의례로 취급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어릴 적 설날 고향을 생각하면, 지금은 사라지고 있는 게 정말 많다. 마음속에 새겨진 ‘고향’은 아늑하지만, 실제로 가 보면 헛헛함을 감출 수 없다. 마을의 옛 모습은 이미 뭉개진 지 오래고, 보이지 않는 어르신들도 많다. 인사하면 반갑게 맞아 주시던 어르신들이 하나둘 떠나면 빈집만 남는다. 같이 놀던 친구들도 타지에서 사느라고 바쁜지, 설날인데도 고향에서 얼굴 보기가 어렵다. 고향이지만 딱히 얘기를 나눌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게 요즘 설날이다.

외형적인 풍경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지와의 대화도 매우 조심스럽다. 설날이라고 형제, 조카들을 만났지만, 마음속에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이 떠오른다. 무심결에 나올지 모르는 껄끄러운 말을 하지 않도록 자기 단속부터 한다. 직장에 다닌다면 연봉이나 결혼 계획을, 이미 결혼했다면 집 장만, 임신 여부 등 질문은 피해야 한다. 아직 중·고교생이나 취준생이라면 성적이나 취업에 관한 사항은 더 금기다.

정치 얘기 역시 금기 목록에서 빠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정치 얘기는 언제나 가장 만만한 대화의 소재다. 게다가 우리나라 국민은 정치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그런데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정치 얘기가 언제부터인지 서로 피해야 하는 소재가 됐다. 특히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에 괜히 정치 얘기를 꺼냈다가는 지청구를 듣기 십상이다. 여야로 갈려 서로 헐뜯기에만 바쁜 정치판 싸움이 명절 밥상에 고스란히 올라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민생과 동떨어진 여야의 정치 싸움이 극에 달한 이번 설날에는 더욱 정치 얘기는 금물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지만, 누구 할 것 없이 정치 얘기엔 입을 꾹 닫는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뒤 처음 맞는 설날인 만큼 새 정부의 국정 수행 등 많은 얘깃거리에도 정치 얘기는 달갑지 않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관련 뉴스가 나오면 그사이에 침묵만 흐른다. 괜히 이런저런 말을 꺼냈다가 논쟁으로 이어질까 꺼리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설날 밥상에 모인 국민들의 말마저 사라지게 한 셈이다.

그러니 오랜만에 모인 귀한 만남인데도 별달리 서로 주고받을 만한 얘깃거리가 없다. 얼굴만 한 번 쳐다본 뒤 어른들은 대부분 텔레비전으로, 조카들이나 아이들은 스마트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반면, 정치권의 말은 너무나 많고 복잡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설날에는 특히 여야 정치권을 막론하고 민심 탐방을 명목으로 돌아다니면서 쏟아 내는 말들이 더 흘러넘친다. 하지만 여야 모두 최근의 정치 상황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당리당략에 따른 의도적인 탐방과 분석이어서 편향성이 매우 심하다. 매년 명절 때마다 서로 경쟁하듯이 내놓은 각 정당의 민심 분석이 정작 국민들에게는 큰 반향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다.

올해는 유독 이런 측면이 더한 것 같다. 윤 대통령의 최근 강공 위주의 국정 수행을 두고는 여야 간 가시 돋친 말들이 오간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빈번한 검찰 소환에 대해서도 여야의 팬덤·진영 간 힘겨루기가 극단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이 분석한 올해 설날 민심 역시 여야의 입맛에 따라 늘 그렇듯이 아전인수식 해석이 대부분이다. 단적으로 국민의힘 소속의 한 의원은 “대통령을 도우라는 것이 설날 민심”이라고 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은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는 게 설날 민심”이라고 말했다. 이러니 가족·친지들과 마주 앉은 설날 밥상머리에서 정치 얘기가 사라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최근 정치권의 관심사로 떠오른 선거구제 개편 논의도 마찬가지다. 정작 국민들은 무덤덤하기만 하다. 이 문제가 복잡한 탓도 있지만, 정치권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제도 자체가 관건이 아니라 정치권 자체가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2020년 제21대 총선 당시 ‘꼼수 위성정당’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처럼 보통의 국민들은 갈수록 정치에 대한 공개적인 얘기조차 꺼린다. 정작 정치의 주인인 국민은 말을 잃고, 정치인들의 말만 횡행하는 꼴이다. ‘정치의 말’은 이제 정치인의 전유물이 된 느낌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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