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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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영 동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더 그렇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면 대하소설이 될 것’이라는 말은 자신의 생애를 작품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게 보통 사람의 소망임을 말해준다.

대부분은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 작품은 작가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특별한 사람의 생애만 글로 남길 가치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기 이야기를 할 방법이나 통로를 갖지 못해서인 경우도 많다. 글과 기록, 또는 문학이 오랫동안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반면, 글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가 잊히고 사라진 이유다.

부산시 북구 덕천동 BMC 아파트 주민들의 이야기도 그렇게 사라질 뻔했다. 다행히 이분들은 지난해 말에 자기 생애 이야기책을 한 권씩 갖게 되었다. ‘사회보장특별지원구역사업’의 일환으로 북구청의 지원을 받아 남산정종합사회복지관이 진행한 ‘천권 도서관-인(人) 스토리’ 프로젝트 덕분이다. 주민 990명의 생애 이야기를 담은 장서로 가득 찬 마을 도서관을 꿈꾸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2021년 시범 사업에 이어 작년에 총 30권의 주민 참여도서를 만들어냈다.

이 가운데 10권은 우리 과 학생들과 함께 만들었다. 책의 기획에서부터 주민 인터뷰와 녹취록 작성, 이야기 만들기, 삽화 작업, 그리고 홍보에 이르는 전 과정을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학생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쉽지는 않았다.

타인의 이야기를 진득하니 들어본 경험도 없거니와 대부분 노년층인 구술자들과 살아온 배경도 너무 달랐다. 인터뷰가 어렵고 낯설기는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타인에게 온전히 들려준 경험도 없고,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 말 없다며 손사래를 치던 주민들도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면, 꿈 많던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고단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하며 눈가를 훔쳤다.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왔는지 새삼 자신을 대견해하고, 얄궂은 운명의 힘에 숙연해했다.

학생들은 이렇게 3~4회에 걸쳐 채록한 인터뷰를 많은 이들이 공감하기 쉽게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주민들과 함께 그린 삽화도 곁들여 10권의 이야기책이 완성되었다. 책이 완성되었다고 끝은 아니다.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 힘을 갖는다. 그 힘은 이야기의 주인과 독자를 모두 변화시킨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학생들이 홍보까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그 때문이다.

학생들은 영상과 카드뉴스를 제작하고, 동의대 인문관 로비에 도서를 전시했다. 중앙도서관에서는 인근 마을의 주민들을 초대해 북 콘서트도 열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또 한 번 위력을 발휘한다. 이웃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삶과 다른 듯 비슷한 타인의 이야기에서 위로를 얻었다. MZ 세대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조부모 세대의 삶에 경의를 표했다.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놀라운 힘을 갖는다. ‘말할 수 없는 존재’여서 ‘보이지 않던’ 이들을 우리 사회에 드러나게 한다. 복지의 수혜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이들이 타인을 위로하는 존재가 된다. 이야기를 통해 세대와 지역, 계층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파편화된 데이터나 정보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헤아리며 듣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 말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 제자가 성과보고회에서 한 말이 그것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내가 과연 타인의 이야기를 글로 옮길 수 있는 그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르신들의 시간을 공유하며 글로 적고, 순간의 기억을 그림으로 나타내면서 필요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소통과 도전을 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소통과 도전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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