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말 이후 한반도와 일본열도 ‘역동적 관계’의 산물[깨어나는 가야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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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가야사] 13. 왜계 고분

남해안·규슈 활발한 해상교역
가야권역 6기·영산강 유역 18기
교류 거점인 수계 따라 조성

공주·부여에서도 39기 확인
야마토 정권·백제 돈독함 증명

가야 권역 왜계 고분 6기 중 ‘거제 농소리 고분’의 2004년 발굴 당시 모습. 문화재청 제공 가야 권역 왜계 고분 6기 중 ‘거제 농소리 고분’의 2004년 발굴 당시 모습. 문화재청 제공

고대사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아우른 백제-가야-왜의 축이 있다고 했다. 5세기 후엽~6세기 전반 이 축의 새로운 현상으로 한반도 중부 이남에 50~60년간 왜계 고분이 돌연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문물이 오가다가 사람이 들어와 정치·경제적 활동까지 한 것이었다. 이때의 왜계 고분은 200년간(4세기 중엽~6세기 중엽) 왜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억지 논리의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왜계 고분은 크게 3곳에서 확인되는데 △백제의 공주·부여 △영산강 유역 △가야 권역이 그것이다. 그중에는 한반도 남부 재지 세력이 왜와의 교류 속에서 만든 ‘창출형 왜계 고분’도 있는데 요컨대 50~60년간의 왜계 고분은 당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역동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먼저 백제 공주·부여의 왜계 고분은 특이한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야마토 정권과 백제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준다. 공주·부여에서 확인된 왜계 고분은 9곳, 39기(공주 33기, 부여 6기)다. 이들 고분은 규슈 북부 세력인 쓰쿠시국(筑紫國)의 500명이 동성왕 즉위 때 호위 군사로 백제에 들어왔다는 〈일본서기〉 기록과 관련된다. 여기에 얽힌 역사적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개로왕의 동생 곤지(461년 일본 파견)가 일본에 15년여 사신으로 머물면서 낳은 아들이 동성왕이었다. 일본에 머물던 동성왕은 479년 백제의 혼란 상황 속에서 귀국해 즉위하는데 이때 야마토 정권이 규슈 쓰쿠시의 500명을 호위 군사로 딸려 보냈다는 것이다. 이들 호위 군사의 사후 무덤이 공주·부여에서 확인되는 왜계 고분, 즉 규슈계 횡혈묘라는 것이다. 이들은 한두 세대를 거쳐 백제화됐기 때문에 더 이상 왜계 고분은 조성되지 않았다.


야마토 정권이 규슈의 쓰쿠시 군사를 징발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열도의 5세기는 제2의 도래인 시대였다. 400년 금관가야의 타격 이후 한반도 남부 가야에서 일본열도로 많은 이들이 넘어가 일본 고대사를 충격했다. 그 결과, 긴키 지방의 야마토 정권은 더욱 강력해졌다. 하지만 야마토 정권이 절대 권력에 이른 건 아니었다. 아직 각 지역 수장 연합 체제의 대표자라는 성격이 짙었다. 야마토 정권이 동성왕 즉위 때 쓰쿠시 군사를 징발한 것은 규슈 세력을 누르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었다.

특히 일본열도 지역 수장 중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곳이 규슈였다. 규슈는 한반도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소화한 최첨단 위치라는 점에서 세력이 강대했다. 물론 규슈에는 가야계 도래인도 많았을 것이다. 야마토는 규슈를 통제하려 했고, 규슈는 자율적 활동을 계속하려 했다. 이런 규슈 세력과 한반도 남해안 일대가 역동적 교류로 연결됐던 것이다. 그것의 표현이 가야 권역과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왜계 고분이다.

과연 왜계 고분들은 규슈 계통 무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왜계 고분은 군집으로 조성되지 않고 교류 거점인 수계를 따라 따로따로 조성됐다. 왜계 고분은 가야 권역 6기, 영산강 유역 18기 등 대략 24기가 확인된다. 많게는 31기로 보기도 한다.

가야 권역 6기는 당시 가야 정세를 반영한다. 400년 고구려 남정 이후 금관가야의 낙동강 하구가 위축됨에 따라 새로 부상하던, 소가야 권역의 경남 서부해안과 아라·비화가야 인접의 낙동강·남강권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왜계 고분은 고성 거제 사천(2) 의령(2)에서 확인됐다. 의령 2곳은 낙동강·남강 변이고, 다른 4곳은 남해안으로 모두 수계, 뱃길과 연결된다. 이들 왜계 고분은 뱃길을 유인하는 표식처럼 돌을 쌓은 즙석(葺石)의 독특한 외관에다가 잘 보이는 위치를 잡았다.

이중 가장 주목을 끄는 왜계 고분이, 기존에 ‘거제 장목 고분’으로 알려진 ‘거제 농소리 고분’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거가대교 인근의 거제 농소리는 일본 규슈와 한반도 남해안을 잇는 관문 거점 지역이다. 왜계 고분에 묻힌 이가 왜인이냐, 재지인이냐, 논란이 많은 가운데 이 농소리 고분만은 규슈 왜인이 묻혔을 것으로 유일하게 의견 일치를 보인다. 무덤과 유물 계통을 따질 때 한반도 남부와 규슈 지역을 연결하는 해상교역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왜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야 권역의 왜계 고분 대부분은 재지적 요소와 결합한 고분이라는 주장이 많다.

영산강 유역의 경우, 왜계 고분 총 18기(많게는 23기) 중 특이하게 일본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 15기가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럿이다. 그중 동성왕을 옹립한 호위 무사들이 임무를 다한 뒤 영산강 유역에 내려가 지역 견제 역할을 한 이후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이 475년 개로왕 전사 이후 백제 혼란기에 성장 기회를 맞으면서 규슈 세력과 정치적 교류를 통해 독자성을 표방한 상징물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마한 재지 세력의 독자성 표방이 왜계 고분으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5세기 후엽~6세기 전반 왜계 고분은 백제-마한-가야-규슈 세력-야마토 정권, 이라는 5자의 역관계 속에서 백제 왕권과 야마토 왕권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가운데 가야-마한-규슈 세력이 남해안 일대에 역동적인 교류 공간을 펼친 증거물인 것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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