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유령은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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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영화 ‘유령’ 스틸 컷. CJ ENM 제공 영화 ‘유령’ 스틸 컷. CJ ENM 제공

마돈나처럼 완벽한 여자가 되어 짝사랑하는 일본어 선생님 앞에 서는 게 꿈인 고1 소년 동구의 이야기를 그린 ‘천하장사 마돈나’. 참신한 소재에 매력적인 인물을 내세운 이 영화 한 편으로 이해영 감독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졌다. 이후 그는 소녀들의 신비로운 얼굴에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로 독특한 미스터리물을 완성했고, 2018년엔 스타일리시한 연출력이 돋보였던 ‘독전’을 통해 감독의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킨다.

영화를 내놓을 때마다 이전 작품과는 다른 결을 선보여 왔던 이해영 감독이 ‘유령’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는 것 같다는 평가처럼 독보적인 미장센을 담아낸 이번 영화는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스파이 액션물이다. 물론 대부분의 스파이물이 그렇듯 어디서 본 듯한 액션 장면도 분명 있지만, 이 또한 감독 특유의 분위기와 만나 새롭게 창조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1933년, 이제 조선이란 단어가 희미해져 갈 무렵의 경성. 누군가는 조선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해방을 꿈꾸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며 적을 처단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희생도 기꺼이 감내한다. 거기 있지만 없는 존재, 자신이 누구인지 존재를 노출해선 안 되는 항일조직인 흑색단. 그들을 일컬어 ‘유령’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유령을 모조리 색출해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뿌리 뽑겠다는 일본. 이 충돌이 바로 영화 ‘유령’의 시작이다.

신임 총독의 경호대장인 ‘카이코’의 임무는 유령의 존재를 밝혀내 조직의 일원들을 처단하는 것이다. 총독부 통신과에서 암호문 기록을 담당하는 ‘차경’,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 감독관 ‘무라야마 쥰지’, 암호 해독 담당 ‘천계장’과 말단 직원 ‘백호’가 유령으로 의심받는 인물들이다. 영화 전반부는 유령으로 의심받는 5명이 외딴 호텔에 감금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유령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심리 추리극의 형식을 띤다. 이후 영화는 유령의 존재가 발각되면서 장르가 전환되어 한 편의 첩보극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영화는 추리나 액션 외에도 영화 속 주요 공간과 소품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유령이 암호 전달을 위해 드나드는 아지트인 극장 황금관과 경성 주변 거리는 비밀스러움과 스산함이 묻어난다. 5명이 감금된 호텔의 경우 고풍스럽고 우아함이 넘쳐나며 영화 속에서 긴장감을 부여하는 소품인 성냥갑, 영화 티켓이나 포스터까지도 상당히 공을 들여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인물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캐릭터의 개성을 살려주는 스타일로 시각적인 즐거움도 만족시킨다.

사실 지금까지 항일 독립투사가 등장하는 영화들의 경우 대부분 남성이 주인공이고 여성들은 주변부 인물로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성들의 연대를 통해 항일투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남성 캐릭터가 부각됐던 ‘독전’을 기억하는 관객들에겐 낯설 수도 있을 텐데, 감독 초창기 작품들의 결을 상기한다면 이번 영화 속 여성 연대는 감독이 이전부터 보여 왔던 작품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화 속 여성들이 함께하는 총격신과 액션은 단순히 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닌, 유연하고 아름다운 몸짓 그리고 결연함까지 더하고 있어 기존에 볼 수 없던 장면들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유령’을 논하면서 배우들의 열연을 빼놓을 수 없다. 강렬한 액션신과 더불어 점차 서로를 신뢰하며 동료가 되어가는 과정을 흡입력 있게 그려내는 이하늬, 박소담과 애묘인으로 등장하는 서현우 배우의 연기는 기묘하면서 귀엽다. 이 영화가 어중간한 추리물이나 첩보물이 되지 않은 데에는 배우들의 힘이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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