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착한 신호등
논설위원
어느 날부터인가 동해남부선 옛 해운대역 앞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빨간색 신호등 위로 빨간색 숫자가 나타난다. 신기하다 싶어 쳐다보니 초록색으로 바뀌기까지 남은 시간을 초 단위로 표시한 것이다. 기다리는 답답함도 없애 주고 무단횡단 예방도 되겠거니 하다 성질 급한 부산사람들을 위한 배려인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부산경찰청에 알아보니 지난해 말부터 부산지역 31곳 80개 신호등에 설치됐거나 설치 중이다. 경찰청이 2022년 초 ‘적색 잔여시간표시 신호등’ 지침을 만들면서 8월 경기도 의정부시에 처음 등장했다. 각 시군구별로 예산 사정에 따라 단계적으로 설치 중이라는 설명이다.
신호등은 교통량 증가와 함께 진화를 거듭해 왔다. 첫 등장은 1868년 영국에서다. 자동차보다 마차가 많던 시절, 마차 운행을 통제하기 위해 런던의 의회의사당 앞에 설치됐다. 기둥 위에 빨간색과 초록색 유리판을 끼우고 가스램프를 얹는 형태의 이 신호등은 교통경찰이 직접 조작했다. 전자식 신호등은 1914년 미국 클리블랜드에 처음 등장했는데 붉은색 신호만 있어 불이 켜지면 정지하고 꺼지면 출발하는 식이었다. 1918년 미국 뉴욕에 오늘날과 비슷한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의 세 가지 색상 신호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0년대 처음 생겼다. 서울 종로와 을지로에 설치된 당시 신호등은 경찰이 세 가지 색의 날개를 번갈아 튀어나오게 수동 조작하는 방식이었다. 해방 이후 미군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점등식 신호등이 도입됐다. 기술 발전과 함께 신호등은 더 똑똑해지고 더 편리해지고 있다. 이는 보행자 안전 면에서도 반가운 일이다. 2000년대 초록색에 먼저 적용된 숫자 표시등도 전자부품업체 대표가 자신의 초등학생 딸이 보행신호에서 건너다 빨간불로 바뀌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당한 걸 계기로 개발하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스몸비(스마트폰+좀비)족들을 겨냥한 바닥 신호등 설치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제 신호등은 교통 흐름과 안전을 위한 약속의 의미를 넘어 도시의 풍경을 바꾸는 상징물로까지 받아들여진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첨단화는 물론이고 디자인 측면의 중요성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신호등 안에 톡톡 튀는 디자인을 새겨 넣은 세계 곳곳의 이색 신호등들은 해당 도시의 메시지를 전하는 플랫폼으로 활용되고 있다. 신호등의 유쾌한 진화를 도시 곳곳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강윤경 기자 kyk9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