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제사는 4대 조까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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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연도(近緣度·Degree of relatedness)라는 말이 있다. 유전자를 공유하는 정도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과 그 아버지 사이 근연도는 1/2이다. A는 어머니의 유전자도 절반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A는 조부모와는 1/4, 증조부모와는 1/8, 고조부모와는 1/16의 근연도를 갖는다. 근연도를 옛 시각으로 보면 피붙이의 정도, 즉 혈연도(血緣度)다. 결국 ‘나’와 ‘4대 조’ 사이 같은 피가 흐를 확률은 겨우 6% 남짓이다. 같은 피붙이라고 하기엔 좀 어색한 수준이라 하겠다.

1518년 조선 중종 때 일이다. 사간 김희수가 “세간에서 〈주자가례〉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며 이를 바로 잡을 것을 간했다. 중종은 반대했다. 풍속을 법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서 전해진 〈주자가례〉는 ‘4대 봉제사’를 요구한다. 중종은 집집마다 관례대로 하면 되지 굳이 중국의 예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점차 사대부가 국정의 주류로 부각하면서 4대 봉제사는 힘을 얻고, 16세기 말 이후엔 관습으로 굳었다. 이전에는 부모까지만 제사를 지내던 일반 백성들도 고조부모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욕을 들었다.

4대 봉제사는 보통 일이 아니다. 기제, 시제, 명절 차례 등등 “산 입에 풀칠하기 버거운데 죽은 조상 위해 장리빚을 낸다”는 푸념이 나올 만하다. 폐단은 현대까지 이어져 1969년 정부가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해 부모까지만 제사를 지내도록 강권할 정도였다. 비록 옅어졌다고는 해도 4대 봉제사의 강박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여전하다.

그런 마음의 부담을 한결 덜 수 있는 일이 지난 1일 있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얼굴도 본 적 없는 고조부모 제사상은 시대착오”라고 단정한 것이다. 국학진흥원은 안동 등 경북 지역의 종가 169곳 중 41곳이 2·3대 조상까지만 제사를 지내더라는 조사 결과를 2019년 발표한 바 있다. 요컨대, 제사의 대상을 대면 조상 즉 얼굴을 기억하는 조상으로 한정하는 게 합리적이며, 유교적 전통이 강고한 영남의 종가들조차 이런 시대 흐름을 따르는 추세라고 결론을 내린 셈이다.

가당찮은 일이라고 역정 내는 이가 혹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풍속도 변하기 마련이다. 종교적 이유로 유교식 제사를 거부하는 이들이 이미 상당수다. 신앙처럼 이어 온 제사도 시류와 어울리는 게 오히려 순리 아니겠는가.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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