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 대패로 가야 제국 ‘멸망의 길’ 접어들다 [깨어나는 가야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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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가야사] 14. 멸망

금관가야의 대표적 유적인 김해 대성동고분군 모습.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금관가야의 대표적 유적인 김해 대성동고분군 모습.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신라, 비화가야 세력권 흡수

백제, 일본행 해상제해권 장악

야마토 정권 ‘친백제’ 노선으로

동남부 3국 투항 ‘멸망 1단계’


관산성서 백제 성왕 전사·패배

신라. 소·아라·대가야 순 멸망


고구려 남정에 금관가야 타격

가야 성장에 ‘결정적 한계’ 작용


6세기 가야는 서서히 멸망에 이른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상황이 5세기와는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최전성기(광개토왕~장수왕 100년) 이후 남진 정책의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한강과 가야를 두고 경쟁한다. 백제는 무령왕(501~523) 성왕(523~554)의 중흥기에, 신라는 지증왕(500~514) 법흥왕(514~540) 진흥왕(540~576)의 전성기에 들어섰다. 혁혁한 백제·신라 왕들의 전략에 맞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가야의 행로였다. 일본열도의 정치 상황도 가야에 유리하지 않게 변했다. ‘일본 고대사의 수수께끼’이자 ‘방계’라는 게이타이(507~531) 일왕이 제3왕조를 새로 열면서 야마토 정권은 친가야에서 친백제로 노선을 바꾸었다. 야마토의 친백제 노선은 이전부터 서서히 진행돼 왔으며 이때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가야 멸망은 전 단계와 1, 2단계가 맞물려 서서히 진행됐다.

멸망의 전 단계는 5세기 후엽 이후 고구려의 침입에서 벗어난 신라와 백제가 동서 가야 권역에 진출한 것이었다. 신라는 먼저 낙동강 동쪽 창녕의 비화가야를 세력권에 넣고 가야 남부로 진출할 기반을 마련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백제가 510~520년대 대가야 서쪽 권역인 기문(남원) 대사(하동) 등 섬진강 유역을 빼앗아 일본열도로 가는 해상제해권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대가야는 자구책으로 신라와 결혼동맹(522~529)을 맺었다. 그러나 결혼동맹은 7년 만에 ‘변복 사건’으로 파탄에 이르고, 가야 내부의 분열을 부르면서 결국 신라에게 가야 남부 진출의 빌미를 제공해 멸망의 1단계로 이어진다.

금관가야의 본격적인 부상을 보여준 김해 대성동고분군 29호분 발굴 당시 모습. 부산일보DB 금관가야의 본격적인 부상을 보여준 김해 대성동고분군 29호분 발굴 당시 모습. 부산일보DB

가야 멸망의 1단계는 금관가야 탁기탄 탁순 등 가야 동남부 3국이 신라에 투항한 것이었다. 이미 비화가야를 접수한 신라는 결혼동맹을 계기로 신라 문화를 가야 동남부 곳곳에도 퍼뜨렸는데 가야의 분열을 포착한 신라는 결혼동맹을 파기하면서 가야 접경의 8개 성을 공격한다. 신라 법흥왕의 능수능란한 강온 회유책에 의해 진영의 탁기탄국이 먼저 항복했으며, 532년 김해의 금관가야, 540년 전후에 창원(마산)의 탁순국이 투항했다. 금관가야의 신라 투항은 가야 모국의 귀순으로 상징성이 큰 사건이었다.

가야 동남부 3국이 투항할 즈음, 가야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복잡하게 움직였다. 527~528년 일본열도에서는 야마토 정권과 규슈 세력의 내전인 ‘이와이 난’이 일어나 야마토 권력은 더욱 공고화했으나 가야 지원군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529년 아라가야는 신라 백제 왜를 불러 ‘안라국제회의’를 열었으나 가야의 활로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 성왕이 가야 제국 7~8개국을 불러 ‘사비회의’를 열었으나 가야의 운명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부산의 복천동고분군과 연산동고분군은 금관가야와 가야 전환기의 대표적 유적이다. 사진은 2012년 부산 연산동고분군 현장 설명회 모습. 부산일보DB 부산의 복천동고분군과 연산동고분군은 금관가야와 가야 전환기의 대표적 유적이다. 사진은 2012년 부산 연산동고분군 현장 설명회 모습. 부산일보DB

가야 멸망의 2단계는 560년을 전후해서 신라의 무력에 의해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가 멸망한 것이었다. 이때 큰 역사적 사건은 554년 신라와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일대 혈전인 관산성 전투였다. 관산성 전투는 ‘포상팔국 전쟁’ ‘고구려 남정’에 이어 가야사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세 번째 큰 역사적 사건, 동아시아적 대사건이었다.

1년 앞선 553년 신라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고 고구려로부터 회복한 한강 유역을 백제에게서 기습적으로 빼앗아버린다. 백제가 가야와 왜의 지원을 얻어 신라에 대한 대규모 보복전에 나선 것이 관산성 전투였다. 그러나 백제-가야-왜 연합군은, 갑작스럽게 성왕이 매복에 걸려 죽고, 군사 3만이 전사할 정도로 대패했다. 역사적 승기를 거머쥔 신라는 소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순으로 가야 제국을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562년 대가야의 항쟁은 ‘반란’으로 호명되는 ‘가야반(加耶叛)’이라 불릴 정도로 거칠었다. 신라는 대가야 주축 세력을 고령에서 200㎞나 떨어진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으로 추방할 정도였다. 대가야의 함락으로 ‘600년 가야’는 현실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이었다.

가야의 멸망의 결정적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400년 고구려 남정에 의한 금관가야의 타격을 꼽을 수 있다. 김해와 부산의 연합세력인 금관가야가 바야흐로 도약하려는 순간에 큰 좌절을 겪은 것이다. 이는 가야 정치체가 발전할 수 있는 그 기세의 맥이 끊긴 셈이었다. 그 여파로 신라 백제(천도는 했으나 왕통은 이어졌다)와는 다르게 가야 정치체는 정치·문화의 기반을 옮겨야 했고, 힘은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5세기 후반 대가야가 후기 가야의 맹주로 다시 부상했으나 신라 백제와의 간극은 이미 많이 벌어진 형국이었다. 특히 대가야의 경우, 신라 백제에 필적하는 찬란한 문화로 고대국가로 진입하는 면모를 보였으나 해상으로 나아가려면 멀리 우회해야 하는 내륙의 지리적 폐쇄성으로 인해 더 큰 성장을 할 수 없었다. 가야 정치체 속에서도 해안 쪽에 소가야와 약화한 금관가야가 있었으나 그와도 연계가 잘되지 않았다. 결국 6세기 위기 상황에서 가야 정치체는 대가야와 아라가야의 남북 이원 체제로 통합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600년 가야사는 말이 없을 뿐, 한일고대사와 지역사의 혈류로서, 동아시아 해역사의 새로운 전망으로서 수많은 언어를 내장하고 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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