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부석사 봄밤 / 고두현(1963~ )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가만히 손대고 눈 감다가

일천이백 년 전 석등이

저 혼자 타오르는 모습

보았습니다.

하필 여기까지 와서

실낱같은 빛 한 줄기

약간 비켜 선 채

제 몸 사르는 것이

그토록 오래 불씨 보듬고

바위 속 비추던 석등

잎 다 떨구고 대궁만 남은

당신의 자세였다니요.

-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낸 편지〉(2017) 중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부석사에서 바라본 노을은 잊을 수 없다. 시인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가만히 손대고 서서 눈을 감는다. ‘일천이백 년 전 석등이

저 혼자 타오르는 모습

’이 천년의 시공을 건너와 노을로 번졌을까. 시인의 전언대로 ‘하필 여기까지 와서’ 우리는 또 영원할 것 같은 오늘을 살아가지만, ‘그토록 오래 불씨 보듬고 바위 속 비추던 석등’도 꺼지듯이 인생은 유한해서 아름다운 것이다. 2월 들어 남녘엔 벌써 매화 꽃망울 소식이 들린다. 봄이 오고 있다. 지난겨울 ‘잎 다 떨구고 대궁만 남은 당신의 자세’에도 봄이 오고 봄밤도 올 것이다. 봄 맞으러 가자.

성윤석 시인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