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새것의 탈을 쓴 낡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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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나리타 유스케라는 예일대 소속의 한 일본인 경제학자가 최근 한 인터넷 방송에서 “급속한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노인들의 집단 자살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실을 보도한 〈뉴욕 타임스〉에 자신의 의견이 맥락 없이 인용 당했다고 해명하긴 했지만, 다른 보도들에 따르면 이전에도 그는 비슷한 주장들을 계속해 왔다고 한다. 그는 경제학자이긴 하지만 전공 분야보다는 소셜 미디어에서 과감한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대부분은 나리타 교수의 주장을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게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19세기에 출현한 이래로 끊임없이 위기의 해결책으로 등장했던 이른바 ‘사회진화론’의 흔적을 나리타 교수의 논리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금기 도전 자체를 파격의 자세로 간주

정치인 개인의 인기가 곧 정치력으로 연결

극단적인 형식주의만 난무하는 시대

진정한 전복은 없고 옛 변형만 반복 ‘씁쓸’

경제의 쟁점을 인구 조절의 문제로 봤던 맬서스가 바로 그 시초일 것이다. 맬서스의 생각은 스펜서로 이어져서 ‘대안은 없다’는 사회진화론의 정언명령을 정립한다. 이 사회진화론이 다름 아닌 우생학의 토대이고, 오늘날 자각 없이 내뱉는 이른바 정책 결정자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발언에서 자주 모습을 보인다.

우생학이라고 하면 나치를 떠올리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역사상 특정 정치세력의 특정 이데올로기로 이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은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생학 자체에 대한 근본적 비판도 원천 봉쇄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당신의 사고가 우생학적인 것이라고 하면 그럼 ‘내가 나치란 말인가’라는 식으로 범주 오류의 문답을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우생학은 나치뿐만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많은 발전론자들이 공유했던 사상이었고, 아시아의 엘리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리타 교수의 경우만 보더라도,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노인 집단의 소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뿌리 깊은 우생학의 유산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발언들을 개인의 도덕성 결핍으로 규탄하는 것은 절반만 옳은 판단이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의 도덕률을 우습게 여기고 거기에 도전하는 것을 파격적인 태도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기존 진보 가치의 도착성을 보여 준다. 체 게바라의 패션이 1980년대 람보의 패션이 되듯이, 이런 가치 전도는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금기에 도전하는 행위 자체를 전복적인 태도로 간주하는 극단적 형식주의가 오늘날 도착적인 가치 전도의 대중화를 조장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파격의 형식만 끊임없이 복제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는 영합주의가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극단화하고 있다. 이로써 정작 정치가 관장해야 할 영역이 희미해져 버렸다는 것은 한국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명백하다. 정치인 개인의 인기를 곧 정치력으로 치환해 버리는 이런 발상은 세대 격차나 계급 불평등의 문제를 사적 이익의 문제로 덮어 버리는 우를 범하게 한다.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단체를 일러 ‘공익의 발목을 잡는 반사회 단체’로 묘사하면서 헌법이 보장한 시민권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들이 이런 사례에 속할 것이다. 맥락을 놓고 보면 이런 행동은 고령화 문제의 책임을 엉뚱하게 노인 집단에 돌리는 발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국가의 성립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바로 모든 민족 구성원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합의는 나치즘의 발원에서 보듯,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으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민족의 구성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평등의 이념은 그 민족의 단일성을 내부에서 해체한다.

헌법이라는 것은 방황하는 평등의 이념을 고정시킨 사회적 합의이다. 따라서 특정 경제학자나 지방자치단체장이 자기 호불호에 맞춰 누구를 배제하고 누구를 포함시킬 수 없는 일이다. 상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이런 합의를 파괴하는 행동을 영웅시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 들어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상당 부분 세계적 차원에서 대안을 이야기하던 세력들이 약화된 오늘날의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파격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그렇게 파격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나리타 교수의 발언만 놓고 보더라도 집단 자살을 권한 대상인 노인 집단에 비해서 그 자신이 훨씬 새로운 세대에 속한다고 믿는 듯하지만, 그의 논리는 19세기적인 사회진화론의 반복일 뿐이다. 낡은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낡은 것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처럼 귀환하는 비루한 현실이 이 시대의 불모성을 보여 주는 사태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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