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으로 봐줄 시기는 지났다 [남형욱의 오오티티]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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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미디어부 기자

넷플릭스 영화 '정이' 스틸 컷.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영화 '정이' 스틸 컷.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의 인기가 무서웠다. OTT 콘텐츠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지난달 20일 공개된 정이는 딱 나흘 동안 넷플릭스 영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승리호’ ‘고요의바다’ 등 국산 SF영화의 들쑥날쑥한 성적표 사이에서 꽤 선방한 셈. 그러나 수치적인 평가와 달리 알맹이는 뻔한 국산 ‘신파 SF’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 SF 영화는 왜 이럴까?

한 가지 분명히 해두자. ‘한국은 SF 불모지다’라는 말은 틀렸다. 한때 한국영화는 리얼리즘이 지배했다. 식민 지배와 전쟁과 냉전, 급격한 경제성장을 겪으며 오직 ‘먹고 사는 일’에만 매달린 대한민국 땅에서, SF 장르는 ‘허무맹랑한’ 영화 취급을 받았다.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났다. 우리는 배가 부르다. 현실을 벗어난 사유가 가능하다. 할리우드의 10년을 지배한 ‘마블’은 우리나라에서도 통했고, ‘인터스텔라’ 같은 과학적 개연성을 기반으로 한 ‘하드 SF’도 인기를 얻었다. ‘SF 불모지론’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이에 정(情)이 안 가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영화 내내 익숙한 장면이 이어진다. 우주에 정착한 인류가 벌이는 내전은 애니메이션 ‘건담’에서, 성별만 바뀌었을 뿐 기계로 변한 자기 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면은 ‘로보캅’에서, 기억을 데이터화해 보존한다는 내용은 ‘트랜샌더스’ ‘공각기동대’에서 이미 나왔다. 등장인물이 전원이 꺼지듯 작동을 멈추거나, 몸속 기계 장치가 드러나 알고 보니 ‘내가 사람이 아니라니… ’라는 전개는 식상하다. '리스펙' 없는 오마주에는 거부감만 생길 뿐. 독창적인 설정도 있다. AI 타입이 자본의 유무에 따라 인간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A 타입부터, 정이처럼 인권을 보장 받을 수 없는 C 타입까지로 나뉘는 건 흥미롭다.

연상호 감독의 신파도 힘을 못 쓴다. ‘정이’는 전쟁 영웅 윤정이의 뇌를 복제, 최강의 전투 AI를 만드는 사람들의 갈등을 그렸다. AI 개발을 이끄는 윤정이의 딸 윤서현. 신파의 핵심은 모녀의 정이다. 그러나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서현은 어머니의 기억을 지닌 AI가 모르모트처럼 쓰이다 폐기되는 과정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목숨을 바쳐 AI ‘로봇’을 탈출시킨다. 하지만 ‘인간’ 윤정이는 식물인간 상태로 여전히 병원에 누워있다. 말 못 하는 인간보다 어머니의 기억을 가진 로봇을 어머니로 여긴다는 걸까? 정이의 AI가 남용되는 게 싫다면, 설정대로 A타입 AI에 어머니를 이식하려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닐까? 정이는 시각적 쾌감을 주는 장면도, SF 장르만이 던질 수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도 없다. SF를 우리나라 감독과 배우가 만들고 연기했다고 감지덕지하며, 정으로 봐줄 시기는 오래전에 지났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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