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국제 무역항 늑도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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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부터 연안을 따라 조성된 고대 항구는 항해하는 선박의 수리와 식량 확보, 물자 보관 등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란 영화로 유명한 건지섬은 프랑스에 더 가까워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점령한 유일한 영국 영토였다. 건지섬은 철기 시대부터 브리튼~프랑스~이베리아 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 교역망의 거점 항구였다. 항구 뒤편에는 항해 중 선박 수리를 위한 ‘선박용 쇠못’ 등 철제 도구를 생산하는 대장간도 발견됐다. 동남아시아에도 기원전부터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아우르는 해상 교역망의 거점 항구인 태국 남부 말레이반도에서 인도산 토기, 유리 제품 등을 생산하는 수공업 구역과 철기 제조 시설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한반도에도 이와 유사한 국제 교역항이 있다. 경남 사천시와 남해군 창선 사이의 표주박 형태의 작은 섬 늑도(勒島)이다. 늑도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 전반, 낙랑·대방~서해~남해~김해~대마도~일본의 이키섬과 큐슈로 연결되는 동북아시아 해안 루트 거점 항구였다. 최근 늑도에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온돌이 발견됐다고 한다. 사천시와 (재)울산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4일 ‘늑도 유적 발굴 조사 설명회’에서 “초기 철기시대 집터 2기와 온돌 시설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늑도에는 중국제 토기 및 일본계 제사용품, 이방인들의 매장 풍습도 발견돼 원주민과 외지에서 유입된 기술자, 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던 자유 무역항이었음이 다시 확인됐다. 늑도에서 아시아의 문화와 사람, 기술이 마구 뒤섞이면서 새로운 하이브리드 문화가 태어날 수 있었다. 교역항은 다른 문화와 다른 환경이 만나 지식과 정보가 흡수되고 발산되는 거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 고대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허브였던 늑도의 따뜻한 온돌방에 옹기종기 모인 중국과 일본, 한반도 사람들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힘든 항해에 지친 몸과 마음을 서로 보살펴 주면서, 바다 네트워크를 공유하는 국제 무역인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2000년 전 손바닥만 한 섬에서 공존, 협력, 연대감, 개방성, 앞선 기술로 풍요를 누렸던 고대인들의 지혜가 바로 인근의 국제항구 부산에 큰 교훈이 될 듯하다. 세계적인 축제인 2030월드엑스포 유치를 앞두고 위세와 강압이 아니라, 평등한 네트워크와 개방성, 기술로 함께 성장하려는 마음이 해양 도시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늑도에서 부산의 미래를 배웠으면 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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