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무라카미 다카시와 예술 패러다임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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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전. 부산일보DB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전. 부산일보DB

프랜시스 베이컨은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 초상’에 따른 습작’에서 절규하는 교황의 모습을 담았다. 마치 전기고문을 당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굳게 다문 입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교황의 권위를 보여 준 벨라스케스의 원작과는 사뭇 다르다. 베이컨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왜곡함으로써 진실을 오롯이 드러내는 화풍을 취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뭉개진 얼굴과 도축장의 고깃덩어리와 다름없는 육체를 통해 인간의 고통과 절망, 죽음의 필연성을 처절하게 그렸다.

최근 부산시립미술관 무라카미 좀비전에서 베이컨을 오마주한 작품을 만났다. 베이컨이 즐겨 그린 십자가 책형(磔刑) 삼면화와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습작’이 떠올랐다. 종교적 내러티브, 즉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잔혹한 고통과 절망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던가. 반면, 무라카미 다카시는 현대 소비사회의 지독한 탐욕을 매달았다. 배경에 에도시대 고급문화를 상징하는 금박을 사용한 점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베이컨이 고통을 쏟아내는 통로로 입을 강조했다면, 다카시는 요괴 탄탄보를 변형한 그로테스크한 눈과 입을 통해 욕망의 과잉을 경계했다. 입으로 욱여넣었던 탐욕을 도로 뱉어내면서도 눈으로는 끝없이 또 다른 욕망을 좇는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이다.

다카시는 이른바 수퍼플랫(superflat)을 지향했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위계를 해체하려 한다. 오타쿠와 왜곡된 섹슈얼리티, 좀비를 통해 전후 일본문화의 구조와 기저에 깔린 욕망을 드러내고, 이를 예술의 영역에서 재구성하고자 했다. 또한 물신주의를 꼬집고 재난과 전쟁의 비극을 형상화함으로써 인류 전체를 향한 메시지를 던지기도 한다. 방식은 철저히 상업적이다. 소비자의 갈망을 충족하기 위해 회화와 애니메이션, 조형, 디지털 아트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다. 색감이 화려하고 스케일도 크다. 이를 위해 수백 명이 함께 작업한다. 다카시는 예술을 비즈니스로 인식하는 예술기업론을 내세웠다. 그만큼 작가는 소비자의 기대를 충족하거나 앞서가야 한다고 본다. 루이 비통과의 협업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카시는 예술가인 동시에 상인이라 자처했다. 단순한 상업미술가는 아니다. 자기 내면의 가장 흉한 것과 직면하면서 예술 자체를 바꾸고 미술의 정의를 확장해 온 작가다. 흥미로운 서사와 캐릭터로 대중의 욕망과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예술적 실천을 이어왔다. 그가 창안한 캐릭터는 이미 생생하게 살아서 스스로 말하며 세계의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예술의 영역은 필연적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기술혁명과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물결이 범람하는 우리 시대, 예술은 과연 무엇이며 예술가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예술사회에 던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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