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장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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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세계 여성의 날’ 상징하는 빵과 장미
먹고사는 생존권과 참정권을 의미
수많은 희생과 거대한 운동의 결과

한국 여성 인권 찾기 치열하게 전개
호주제 폐지·낙태죄 위헌 판결 진전
성 평등을 향한 싸움은 현재진행형

“1936년 봄,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리베카 솔닛의 최근작 〈오웰의 장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신의 정원에 장미를 심고 가꾼 이는 바로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다.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계급의식을 풍자하며 노동자의 현실을 드러내는 치열한 저항의 글쓰기로 유명한 오웰에게 장미라니,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듯하다. 이 반전을 통해 솔닛은 오웰이 현실의 절망과 싸우면서도 사랑과 보살핌, 희망과 아름다움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오웰의 장미는 일상 속의 돌봄, 위기 속의 희망, 절망 속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장미가 떠오른 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면서다. 여성의 날의 상징이 바로 빵과 장미인데, 이는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원한다”는 슬로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유명한 슬로건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 헬렌 토드의 1910년 연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의 투표권(참정권)은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자신의 권리를 갖게 될 모든 아이들에게 집, 피난처와 안전을 의미하는 인생의 빵과 음악, 교육, 자연과 책을 의미하는 인생의 장미를 선사할 것입니다.” ‘빵’이 먹고사는 문제, 즉 생존권을 의미한다면, ‘장미’는 참정권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이 연설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참정권은 빵과 장미 모두를 위한 것이며, 이때 장미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바임을 알 수 있다.

켄 로치 감독의 동명의 영화 ‘빵과 장미’의 대사처럼 “누구도 장미를 거저 주지 않았다”. 노예 해방과 더불어 1870년 흑인 노예에게도 투표권을 주었던 미국에서는 여성들이 쇠사슬을 몸에 두르고 백악관 앞에서 투쟁을 한 끝에 1920년이 되어서야 겨우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전투적인 참정권 운동이 벌어졌던 영국에서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이 달리는 국왕의 경주마 앞에 몸을 던져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의 투표권이 주어진 것이 겨우 2015년이 되어서였다. 이처럼 여성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누리고 제자리를 찾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희생과 거대한 운동이 있었다.

한국 사회 역시 여성 인권에 있어 커다란 진전을 일구어 왔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낙태죄는 위헌 판결을 받았으며, 여성 폭력을 가시화하고 법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까지 성별 임금격차는 OECD 국가 중에 가장 심각한 수준이고 유리 천장 지수도 전 세계에서 최고에 달하지만, 여성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한 싸움에 한국의 여성들이 누구보다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저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되찾는 여정이었다. “다 같은 인간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국에서 가족법을 개정하는 데 앞장섰던 이태영 변호사는 가족법 개정에 대한 소감을 묻는 질문에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여성이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자리’를 찾았을 따름입니다.”

오늘날 현실에서는 여전히 생존권을 위한 빵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고, 또한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얻기 위한 장미의 투쟁도 벌어지고 있다. 어느 나라에는 히잡을 벗어던질 수 있는 자유가, 어느 곳에서는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평등이 장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여전히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안타깝다. 이란에서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히잡 착용을 거부하며 목숨을 건 시위가 벌어지고, 여학교를 중심으로 독가스 테러가 일어나는 등 심각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정치권이 앞장서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의 인권과 성 평등 가치를 위한 노력을 폄훼하면서, 이를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올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열린 한국여성대회 자리에 성 평등을 지지하는 외교관들도 참석하였는데, 주한 EU 대사의 말이 가슴을 울렸다. “우리는 여성들이 이룬 업적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성 평등은 유럽연합과 여기 참석한 국가들의 핵심 가치이자 모든 정책에서의 우선순위다. 모든 여성과 소녀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길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동등한 기회를 가지며 동등하게 우리 사회에 참여하고 이끌 자유가 있다.” 성 평등 가치가 국제사회에서 보편적 상식임을 담담하게 드러내기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걸렸다.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힘들게 얻어 낸 인생의 장미다. 우리 모두에게도 장미를 가꾸고, 인생의 장미를 누리고 살 권리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한 건 아닐까. 세계 여성의 날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장미의 이름을 한번 더 되새길 수 있는 그러한 날이 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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