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봄은 어떻게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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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벚꽃으로 물든 봄 풍경. 부산일보DB 벚꽃으로 물든 봄 풍경. 부산일보DB

이 봄,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를 읽는다. 무겁다. 콜럼버스와 신대륙 ‘개척’이 상징하는 정복자 중심의 미국사를 뒤집고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했다. 학살당한 아메리카 원주민, 노예제도의 희생자, 억압받던 여성의 목소리를 소환했다. 〈살아있는 미국역사〉는 이를 쉽게 풀어쓴 저작이다. 미국사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도 민중의 저항과 투쟁의 날들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 어려운 인문 고전을 ‘읽어내는’ 방법이다. 클래식음악도 마찬가지다. 서양음악의 문법을 모르는 이가 제목이나 가사 없는 작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는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낼 것인가〉에서 음악 듣기의 기술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음악이 추상적이라 하더라도 재료를 논리정연하게 조직한 작곡가의 뜻을 ‘들어낼’ 때 음악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단다.

코플랜드가 음악에 담은 대상은 미국이었다. 유럽 음악을 맹목적으로 추수하지 않고 음악을 통해 미국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재즈와 민요, 블루스를 두루 활용하여 미국적 정서를 한껏 살렸다. 대중에게 쉽게 다가서기 위해 음악을 단순하게 만들었으며, 발레나 영화와 같은 인접장르와 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 대중과 유리된 현대음악에 반기를 들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악,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음악(Gebrauchsmusik)을 추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신기루와 같은 번영의 끝에 찾아든 대공황의 시기를 건너는 길이기도 했다.

‘애팔래치아의 봄’은 ‘보통 사람을 위한 팡파르’ ‘엘 살롱 멕시코’와 더불어 코플랜드의 대표작이다. 애팔래치아는 미국 동부의 큰 산맥이며 이민 초기 유럽인들의 정착지다. 이 곡은 미국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의 발레 공연을 위해 작곡했다. 강인한 의지와 개척정신으로 황야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어가는 신혼부부 이야기로, 척박한 현실을 극복하고 꿈을 실현하는 모습을 그렸다. 불확실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 느리고 차분한 음악으로 시작하여 역동적인 사운드로 변모한다. 광활한 산야에 번져나가는 신생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봄이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낯선 땅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그곳에 부는 봄바람을 거듭 생각한다. 개척 신화에 가려진 시대, 숱한 폭력과 희생을 딛고 우뚝 세운 자유와 정의, 평등이란 실상 빛바랜 가치가 아니고 무엇이랴. 애팔래치아산맥에도 백두대간에도 우리 삶이 깃드는 자리마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읽어낼 것도 들어낼 것도 없는 그저 봄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청매 홍매는 저토록 환하건만 여전히 시리고도 슬픈 계절이다. 하워드 진은 P.B.셸리의 시를 빌어 외친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처럼 일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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