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침묵의 봄, 폭력이 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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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학평론가

지난 일요일에 집 밖을 나서니, 나들이객들이 봄이 오는 세상을 이미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들의 표정까지 화창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새 늘어난 양지의 세상보다, 아직은 어둠이 드리운 음지의 세상이 더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었을까. 봄이 오는 소리는 분명 들려오지만, 세상의 구석구석에는 오지 않는 봄으로 아직도 앓아야 하는 진통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와는 제법 떨어져 있다지만, 세상 저편에는 1년째 전쟁 중인 곳이 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정의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죽고 죽이는 폭력이 세상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지울 길이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세상 저편에선 1년째 전쟁 지속

폭력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전망

학교 폭력과 한·일관계에도

힘에 대한 맹신 도사리고 있어

바로잡지 않으면 또 다른 폭력 노출

공정과 상식 작동하는 사회 돼야

한국 내의 고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공정이나 상식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위계와 폭력으로 얼룩진 곳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친구를 학대하고 타인의 자식을 정신적으로 압살하는 부모들이 등장했다. 학교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지키겠다고 남의 아이를 죽이는 부모들은, 어쩐 일인지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위계 문제는 줄어들지 않는다. 경제적 실리를 앞세워, 자신의 잘못된 가치관을 세상을 위한 행동인 양 선전하는 무리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후손들에게 불편한 관계를 물려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왜곡된 역사관을 세상에 버젓이 통용시키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공정과 상식으로 바꿔 부르고자 하는 듯했다.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다툼이 아이들 사이에서 단순히 치고받는 우발적 사고로 끝나지 않고, 그 폭력 뒤에 힘의 행사를 우열 관계에서 응당 발생할 수 있는 당연한 처사로 믿는 비뚤어진 가치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학교 폭력 뒤에는 힘센 부모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거나 상대 아이의 부모가 약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사면받을 수 있다는 힘에 대한 맹신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힘에 대한 맹신은 우리와 주변 국가 사이에도 작용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했고 그 결과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이를 힘의 논리로 포장하여 잘못을 감추거나 관점의 차이로 몰아붙여 과거 행동 자체를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태도가 동일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진실로, 용납할 수 있을까. 실리나 경제나 미래 같은 말로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를 건너뛰고 진실을 호도하는 이들의 이익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이 우리의 숙적인 이유는, 과거 35년의 역사 때문만도 아니고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 때문만도 아니다. 그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부정하고, 그들의 과거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태도 뒤에, 언제든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자기 합리화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학교 폭력을 함부로 무마할 수 없고, 논문 표절을 역시 외면할 수 없고, 주가 조작과 각종 비리를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덮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힘의 행사가 교실에서, 법의 테두리 내에서, 정부 정책에서, 외교 관계에서 계속 자행될 것이고 그 문제를 바로잡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폭력에 시달릴 위험까지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 사회는 공정과 상식의 사회가 아니라 위계에 따른 힘의 논리가 더 크게 작동하는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는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다시 오고야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봄은 왔지만, 그 소리도 들리지만, 이 봄을 좀처럼 화창함 그 자체로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래서 아주 약간은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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