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의춘상행
입춘첩 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월 하순이다. 세월의 빠르기가 실로 살과 같다. 입춘 때 쓰는 글귀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이다. 그런데 그것은 원래 ‘의춘대길’이었다. ‘의춘(宜春)’은 ‘풍우가 고른 봄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한 해 농사가 잘되고 재난이 없기를 바라는 소망이 숨어 있다. 옛날 입춘일엔 ‘의춘’ 두 한자 모양을 종이로 오리거나 글씨로 써서 창이나 문 등에 붙여 봄맞이를 표시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이 말은 오랫동안 쓰이다가 병자호란의 치욕 이후로 우리 문헌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의춘은 부산과 이웃한 경남 양산(梁山) 지역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신라 문무왕이 창녕 땅의 동쪽을 떼어 내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한 곳이 양산 땅이다. 경덕왕 때 이를 ‘양주(良州)’라 했고 고려 때는 ‘양주(梁州)’라 했다. 〈삼국사기〉의 ‘지리지’에 나오는 기록이 그렇다. 조선 태종 때 비로소 양산군(梁山郡)이 된다. 〈세종실록〉은 ‘양산군의 별호는 의춘이며 또 순정(順正)이라고도 한다’고 적고 있다.
의춘과 순정이라는 별칭처럼, 양산에는 도리를 거스리지 않는 바른 기운이 넘실거린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일신의 영달을 접고 독립운동에 열정을 불사른 인물이 적지 않다. 그 중심에 양산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우산 윤현진이 있다. 그는 자신을 당당히 ‘의춘인’이라고 불렀다. 그의 행적 가운데 특별한 눈길을 끄는 것은 의춘상행(宜春商行)의 설립이다.
1919년 양산 지역은 일본인들이 상권을 쥐고 있었다. 이때 의춘상행은 지역민들에게 일용 잡화를 염가로 공급해 경제 여건을 개선하고 일본에 대한 저항 의식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오래가진 못했지만 일본 상인들에 대항해 불매 운동을 주도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비조합이었다는 점에서 의춘상행의 의미는 크다.
최근 의춘상행 설립 당시의 허가 신청서 원본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이런 의미에 무게감을 더해 주기에 충분하다. 회사 개요라든지 발기인 의결록, 정관, 창립 회의록 등이 담겨 있어 정확한 설립 취지와 진행 과정을 알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총독부 관보에 소개된 등기부 등본 이외의 자료는 없었다. 경제 자립과 독립자금 모금이라는 취지의 소비조합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더 깊은 연구가 가능하리라 본다. 우리 지역사를 풍성하게 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