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시간 무차별 폭격… 월미도는 단테가 그린 지옥이었다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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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 인천상륙작전 (하)

북한군 추정 병력 1000명 달해
일대 초토화 목적 가진 절멸 작전
‘악마의 무기’ 네이팜탄 집중 투하
인천상륙작전 불확실성 모두 제거
폭탄 떨어지자 온 동네 ‘불바다’
갯벌 대피 주민, 진흙 바르고 버텨
순식간에 초반 전세 뒤집었지만
민간인 최소 100명 희생 추정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미도에서 유엔군 병사들이 소총을 들고 불타는 민가 옆을 지나고 있다(위에서부터·출처:NARA 127-GR-25-172-A2739 001-ac). 같은 날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인천 시내(출처:NARA RG 111-SC-B 735 348505)와 인천 중구 월미도 일대 현재 모습. 전갑생 제공·조재현 경인일보 기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미도에서 유엔군 병사들이 소총을 들고 불타는 민가 옆을 지나고 있다(위에서부터·출처:NARA 127-GR-25-172-A2739 001-ac). 같은 날 폭격으로 폐허가 된 인천 시내(출처:NARA RG 111-SC-B 735 348505)와 인천 중구 월미도 일대 현재 모습. 전갑생 제공·조재현 경인일보 기자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초반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지만, 인천의 피해는 막심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세를 뒤집기 위해 육해공군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하는 바람에 상륙지인 월미도는 쑥대밭이 됐다. 파괴된 인천 시내에서도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꼽히는 군사 작전의 이러한 이면은 지역 차원에서만 간간이 다뤄질 뿐이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갑생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굴한 사진에서 당시 피해를 엿볼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950년 9월 15일 월미도 동쪽 마을의 민가는 폭격을 맞아 불타고, 소총을 든 유엔군 병사들은 수색 활동을 하는 듯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활활 타오르는 민가의 모습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며칠 전 월미도 일대를 공습할 때, 대대적으로 퍼부은 화염 무기 ‘네이팜탄’의 위력을 그대로 보여 준다. 집에 난 불을 다급히 꺼야 할 주민이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건 폭격에 희생됐거나 피란에 나섰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의문이 남는다. 정말 전쟁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을까.

■단테가 그린 지옥, 월미도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의 피해는 정부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1기가 2008년 ‘진실’로 규명한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보고서와 미국, 프랑스 기자들이 쓴 글에서 잘 나타난다. 상륙작전 닷새 전인 1950년 9월 10일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군 해병대항공단 항공기는 월미도 동쪽 지역에 세 차례에 걸쳐 엄청난 분량의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육지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유엔군은 9월 13~14일 월미도와 인천항 등 시내 일대에 함포사격과 공습을 감행했고, 다음 날 상륙을 개시했다.

월미도 동쪽에는 120가구, 600여 명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당시 월미도에 주둔한 북한군 추정 병력은 미군 기록상 1000명이었다. 한국군 참전자 회고록엔 고사포 4문과 병력 400여 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됐다.

월미도 주민 전 모(당시 17세) 씨는 네이팜탄이 투하된 날 “폭탄이 떨어지자마자 불이 확 붙어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됐다”고 증언했다. 주민 유 모(당시 27세) 씨는 같은 날 새벽 집에서 잠자다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가 갯벌로 도망쳤다. 갯벌로 대피한 주민들은 미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피하려고 서로 진흙을 발라 줬다고 한다.

공습이 잠시 멈췄을 때 돌아간 마을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유 씨의 시아버지는 머리에 파편 2개가 박힌 채 희생됐다. 집집이 희생자 시체를 가매장했다. 폭격이 다시 시작되자 생존자들은 불타 버린 집과 희생자를 다 수습하지도 못한 채 월미도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 1기는 월미도에서 민간인이 최소 100명 희생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국전쟁통신〉에는 인천상륙작전 현장에 있었던 프랑스 종군기자 앙리 드 튀렌이 쓴 당시 르포기사가 실렸다. 그는 월미도의 모습을 '정녕 단테가 그린 지옥이었다'고 묘사했다.

'항만 전체가 을씨년스러운 자줏빛으로 환하게 불타올랐다. 바다와 하늘은 피처럼 검붉었다.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쏘아 대는 함포가 모든 함정을 뒤흔들었다. (중략)코세어 전투기는 우리 전방 200m 앞 해안까지 네이팜탄을 끊임없이 퍼부었다. 그 거대한 불기둥을 치솟게 하는 포격은 어둠 속에서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인천 시내의 폭격 피해도 컸다. 전 연구원이 미군 자료 등을 발굴·분석해 쓴 〈인천과 한국전쟁 이야기〉를 보면 인천 시내 폭격은 9월 7~21일에 이어져 곳곳을 완전히 파괴했다. 특히 유엔군 상륙 직전인 14일 오전 5시 55분부터 60시간 가까이 월미도와 인천 일대에 폭격 작전이 전개돼 폭탄, 네이팜탄, 기총소사가 78차례 진행됐다. 또 1000-1B 범용폭탄 100개가 투하됐고 로켓탄 115발 공격이 이뤄졌다. 이어 15일 오후 5시 5분 로켓함 3척이 20분 동안 로켓탄 6000여 발을 인천으로 발사했다.

이 기간 인천의 인명 피해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전 연구원이 NARA에서 발굴한 1950년 9월 15일 촬영 사진 속의 건물들이 당시 피해 상황을 가늠하게 한다. 불타고 무너진 인천 시내 모습은 당시의 참담을 보여 준다. 〈한국전쟁통신〉의 9월 16일 르포기사는 인천 시내를 이렇게 서술했다.

'섬과 내륙을 잇는 인천은 여전히 연기가 치솟는 죽음의 도시였다. 담배 공장은 엄청난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고, 그 화염 기둥은 30m 높이로 치솟아 지독한 악취를 퍼트렸다. 한 청년이 끔찍한 부상을 입은 할아버지를 손수레에 싣고 황량한 대로를 걸어 내려왔다.'

■예측된 대규모 민간인 희생

인천상륙작전 직전 월미도와 인천 일대 폭격은 초토화 목적의 ‘전략폭격’이었다. 여러 정황상 유엔군은 월미도 일대 민간인 거주지와 인천 시내 민간시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천항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49년 철수 전까지 미군의 군수 보급 통로였고, 부평에는 군수보급기지(현 캠프 마켓)가 있었다. 당시 시가지 지도와 정밀한 항공사진도 확보하고 있었다. 월미도에도 한국전쟁 전까지 미군기지가 있었다. 폭격 피해를 본 월미도 주민들은 진실화해위원회 1기 조사에서 “동네는 완전히 무너졌지만, (전쟁 전부터 있던)미군 부대 막사는 폭격을 받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켜 전쟁을 끝내려는 총공세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병사들에게 “늦어도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 이유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얼마나 화력을 쏟아부었던지 낙동강 전선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쓴 한국전쟁 논픽션 〈콜디스트 윈터〉를 보면 낙동강 전선을 지킨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월미도와 인천에 있는 애송이들을 상대하느라 우리보다 더 많은 탄환을 썼다. 우리는 적의 지상 병력 90%를 감당하면서도 그만한 지원을 못 받았다”고 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갯벌 지대여서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엔 악조건이 많았다. 월미도와 인천 시내 일대 대규모 전략폭격은 상륙작전의 불확실성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한 ‘절멸 작전’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악마의 무기라고 불린 네이팜탄 투하가 연결된다. 네이팜탄은 알루미늄, 비누, 팜유, 휘발유 등을 섞어 젤리 모양으로 만든 네이팜을 연료로 하는 무기다. 3000도 고열을 내면서 3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든다. 전쟁역사가 아라이 신이치는 〈폭격의 역사〉에서 '도시 소이탄(네이팜탄) 공격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전시 생산을 지탱하는 노동력 그 자체의 직접적인 파괴'라며 '공업 노동력, 즉 생산과 관련된 민간인 붕괴에는 노동자뿐 아니라 그 가족과 이웃을 불태워 버리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고 했다.

전 연구원은 “유엔군은 인민군 치하에 있던 인천의 모든 주민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다. 민간 피해를 ‘부수적 희생’으로 봤다”며 “민간인은 전쟁 중 공격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는 헤이그협약 등 국제규범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경호 경인일보 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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