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부러움과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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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일본, 기초과학 세계 최고 수준
중국·인도, 연구 분야 핵심 역할
한국은 단편적 응용기술만 유행

지난주 국제학회 참석차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핵물리학 분야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됐다는 것은 자못 의미심장한 데가 있었다. 벌써 9번째에 이르는 이 국제학술대회는 우리나라 연구자들 국내 연구 모임을 문화적·학문적 공통점이 많은 한·중·일 3국으로 확대 기획한 것이다. 2006년에 한국에서부터 최초로 개최되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 인도가 합류해서 이젠 주최국이 4개국이다. 학회 오프닝 행사에서 환영사를 한 히로시마대 부총장은, 마침 예상했던 대로, 80년 전 인류 최초의 핵무기가 사용된 곳이자 어마어마한 원폭 피해자들이 발생한 바로 그 역사적 현장인 히로시마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주축이 된 핵물리학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된 의미를 강조했다.

히로시마에는 원폭 직후에도 유일하게 잔존한 ‘원폭돔’이라는 건물이 있다. 당초 상업 전시를 위해 세워진 일종의 전시관이었는데, 14만 명의 즉각적인 희생자가 있었던 원폭 이후 3층 높이의 둥근 철골 돔과 앙상한 건물의 형태로 남아 있다. 히로시마 의회는 이 건물을 영구히 보존하기로 하고, 주변에 평화공원을 만들고 국적별로 위령비를 세워 놓았다. 물론, 비록 다소 구석진 곳이긴 해도, 한국인들을 위한 위령비도 있다. 이 건물은 유엔이 정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인류 최초로 상상도 못 할 엄청난 원폭의 위력을 민낯으로 마주해야 했던 일본인들의 공포는 분명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 엄청난 희생의 근원적인 원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환영사 도중 손을 들고 질문할 뻔했다. 그랬다. 한·중·일 3국은, 한자를 비롯해 정말로 엄청난 공통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치와 역사 얘기는 금기 사항이다. 중국 친구들과 사과를 모르는 전범국 일본의 뻔뻔한 역사 왜곡과 적반하장에 대해 속삭이면, 일본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금방이라도 의기투합이 됐다가도, 어느새 일제 말기 조선을 지켜 주지 못했던 미안함을 고백하는 과잉 친절(?)에 할 말을 잊게 되기도 한다. 일본과 중국은 우릴 두고 뒤에서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서로 다른 속내는 과학자들끼리도 예외는 아니다.

복잡한 속내도 잠시, 학술대회는 학자들에게 축제였다. 나라마다 규모와 숫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루어진 온갖 새로운 연구 결과와 토론들은 참으로 흥미롭고 새로운 생각의 원천들이었다. 심지어 국가 간 국력의 차이도 그다지 커 보이진 않았다. 단지 그들의 모든 발표 표지에 나타난 소속이 눈에 띄었다. 일본과 중국, 인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수많은 발표자의 표지에는 당연히 우리에게 익숙한 유수한 대학 이름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그 옆에는 익히 알려진 세계적인 연구 시설을 갖춘 자기 나라의 국립 연구소와 로고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만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기초 연구의 국가적 구심점을 기반으로 한 세계적인 공동 연구의 산물이었다.

모든 학회 참가자가 모여 근사한 저녁을 함께한 만찬은 부러움의 절정이었다. 논문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노회한 노벨상급 연구자들과의 조우, 그들이 보여 준 옛 사진들에 등장하는, 이젠 모두 반백이 된 동료 학자들의 앳된 얼굴들, 1950년대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를 비롯한 유수한 노벨상을 수상한 선배 학자들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찍힌 젊은 청년 학자들은 핵물리학 교재에서 마주한 이들이었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 여전히 역사를 외면하는 파렴치한 정치인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세계적인 연구 시설들을 100년 전부터 세워온 나라. 지금도 그곳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유수한 과학자들이 몰려들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이 밤낮없이 연구되고 있다. 심지어 원폭을 뼈아프게 직접 경험했으면서도 원전은 물론 핵연료 재처리시설까지 갖추고 프랑스로부터 원전 폐기물을 수입해 재활용하고 있는 나라다. 방사선 오염수를 적절히 걸러 내고 희석시켜 약 30년에 걸쳐 공해에 방출하는 것으로 세계를 설득해 내는 나라다.

중국과 인도는 또 어떤가. 거대한 몸뚱이만큼이나 미련해 보이지만 세계적인 군사적, 문화적, 역사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물량으로 세계 경제를 좌우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상대적으로 가난할지는 모르지만 루쉰·타고르 같은 대문호들과 과학적 성과를 자랑하는 자존심 센 나라이기도 하다. 1970년대부터 자국에 건설된 대형 가속기를 비롯한 다양한 세계적 연구 시설은 물론, 막대한 인적 자원을 토대로 전 세계에 진출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나라들의 연구진과 함께하면서 머릿속이, 마음속이 복잡해진다.

노벨상을 늘 이야기하면서도 변변한 기초과학 연구 시설 하나 없이, 수년이 멀다 하고 나노기술과 인공지능을 넘어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정부 주도의 응용기술 유행으로만 들썩이는 이 나라에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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