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의 지발도네(Zibaldone)] 젊은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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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신체의 고통에 경제적 궁핍, 부친의 압박…
최악 상황서도 비평가의 길 택한 발터 베냐민
AI도 범접 못 할 철학적 성취·독창성 빛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스위스의 취리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파리처럼 전쟁의 폐허를 피해 모여들었던 지식인과 예술가의 은신처였다. 그렇게 모여든 피란민 중 한 명이 바로 유명한 유대계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이었다. 1919년 당시 베냐민은 27세였고, 기혼자였고, 아버지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호응한 3·1 독립운동의 여진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 내고 있던 그해 여름, 베냐민은 자기 앞에 놓여 있던 막막한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징병을 피하고자 가장했던 질병이 평생의 지병이 되어 버린 그의 얄궂은 운명처럼 앞으로 다가올 생애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전쟁 중에 실시한 신체검사 결과를 보고 담당 의사는 고맙게도 베냐민에게 스위스의 전문 클리닉에 가서 검진을 받아 보도록 주선했다. 덕분에 베냐민은 전쟁의 참화를 비켜난 중립지대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스위스 취리히는 당시의 베냐민처럼 전쟁을 피해 도피한 유럽 인텔리겐치아들의 천국이었다. 다다이즘을 선언한 작가 겸 연출가 위고 발과 시인 트리스탄 차라를 카바레 ‘볼테르’에서 목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후일 러시아혁명의 중심에 서게 될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 카바레에서 몇 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다.


1919년 취리히를 거쳐 브리엔츠 호숫가에 위치한 펜션에 짐을 푼 베냐민은 베른 대학에서 박사를 하고자 했고, 경제적 활동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 태어난 아들 스테판은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의 평생 동지이자 친구였던 숄렘에게 쓴 편지에서 베냐민은 아픈 아들을 돌보느라 부부가 탈진 상태에 있다고 적었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최면을 걸어 만들어 낸 좌골 신경통은 아예 만성통증을 유발하는 지병이 되어서 베냐민의 밤잠을 방해했다. 이 힘든 상황에서 베냐민의 부친은 장성한 아들에게 경제적 자립을 이루라고 압박했다.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베냐민은 어떤 선택을 했던가. 당연히 베냐민은 자신의 길을 갔다. 당시에 그가 썼던 글에 담긴 내용처럼, 한 인간의 생애를 결정하는 것은 해당 인물의 성격 못지않게 그 인물이 처한 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베냐민이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또한 하필 그때가 전쟁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필 그 성격의 장본인이 베냐민이었고, 하필 그 인물에게 닥쳐온 것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병약한 아들을 돌보느라 힘들기는 했지만 브리엔츠 호숫가에서 베냐민은 좋아하는 보들레르의 시를 독일어로 옮기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삶이 항상 이와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전쟁의 포화는 넉넉한 형편이었던 부친의 경제를 옥죄었고, 부친의 너그러움도 경제적 궁핍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부친은 스위스에 은거하는 베냐민에게 연락도 없이 들이닥쳤다. 물과 기름 같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 본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27세의 베냐민은 부친에게 자신의 장래 희망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공한 비즈니스맨이었던 부친에게 “독립 비평가가 되겠다”는 아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말이 좋아서 ‘독립 비평가’이지 오늘날로 치면 프리랜서가 아니겠는가.

인내력을 소진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명령하듯이, 최대한 빨리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라고 주문했다. “아버지, 저는 비평가가 되고 싶어요”라는 아들의 말은 보기 좋게 묵살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냐민이 부친의 말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어렵게 완성한 박사 논문의 제목이 ‘독일 낭만주의에서 예술 비평의 개념’이란 사실을 확인하면, 아들 역시 아버지의 말을 보기 좋게 묵살했음을 알 수 있다.

베냐민은 칸트를 따라 자신들의 이론을 정립했던 피히테, 노발리스, 셸링에서 독자적인 비평의 개념을 찾아내고자 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비평이라는 활동이 예술 작품을 품평하는 종속적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처 밝혀지지 않는 예술 작품의 지시 대상을 찾아내 폐허처럼 존재하는 작품을 완성한다고 그는 보았다. 창작과 비평을 동등한 관계로 전환한 이런 발상은 20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조숙한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꺾이지 않은 베냐민의 고집 덕분에 우리는 21세기 생성 AI의 시대에도 그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그 앞선 통찰에 감탄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젊은 세대를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려고 한다. 마치 베냐민의 부친처럼 말이다. 그러나 만일 그때 베냐민이 부친의 말에 따라 자신의 고집을 꺾었더라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자. 적어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 철학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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