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가 톤즈로 간 이유 [부산피디아] ep.4
[부산피디아] (4)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의사 대신 사제의 길 택해
가장 가난한 곳, 톤즈에서 헌신
“예수님이라면 성당보다 학교 먼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느라 허리가 굽은 홀어머니에게 번듯이 효도할 수도, 풍족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장된 미래'를 벗어 던지고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이 있다. 바로 의사 대신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난 ‘남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다.
■의사 대신 택한 사제의 길
이태석 신부는 1962년 10월 17일 부산광역시(당시 경상남도 부산시) 서구 남부민동에서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이 신부가 불과 아홉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홀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신부는 집 바로 옆에 있는 송도성당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는데, 이곳에서 본 다큐멘터리 한 편이 그의 삶에 큰 울림을 준다.
이 신부와 함께 수도원 생활을 했던 이태석신부기념관 이세바 관장은 “하와이 몰로다이 섬에서 한센인을 위해 평생 헌신한 ‘다미안’ 신부라는 분이 있다. 그의 생을 다룬 영화를 본 이태석 신부는 ‘나도 저렇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어려운 형편에도 학창 시절 내내 우수한 성적을 놓치지 않았다. 특히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대단해 중학교 3학년 때는 직접 ‘묵상’이라는 성가를 작곡·작사하기도 했다. 천마초, 토성중,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태석 신부는 1981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987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육군 12사단에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이미 10남매 중 2명이 사제의 길을 걷고 있어 가족의 반대가 컸지만 이 신부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1991년 전역 직후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 1994년에 평생 수도자로 살겠다는 맹세인 서원을 받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
로마에 있는 살레시오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1999년 8월, 이태석 신부는 우연히 아프리카 수단에 열흘간 봉사활동을 가게 된다. 이때 전쟁과 가난으로 병든 사람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당시 남북으로 나뉘어 내전 중이던 수단은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족이 없는 장애인들, 거리를 누비는 헐벗은 사람과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아이들을 본 이 신부는 이곳에 다시 돌아올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2001년 정식 사제가 되자마자 남수단의 마을 ‘톤즈(Tonj)’로 간다.
이세바 관장은 “이태석 신부에게 ‘형은 왜 하필 톤즈에 가려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누구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곳에, 가장 가난하고 도움이 절실한 곳에 가는 게 하느님이 맡기신 내 몫인 것 같다’더라”고 회고했다.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진흙과 대나무로 움막 진료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20년 넘게 내전 중이던 수단은 곳곳에 총상 환자가 넘쳐났지만 반경 100km 안에 의사라고는 이태석 신부뿐이었다. 수십km 밖에서도 환자가 몰려와 밤낮없이 진료소 문을 두드렸지만 이 신부는 싫은 내색 없이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았다. 백신을 보관할 냉장고를 돌릴 전기조차 없자, 직접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기도 했다.
특히 이 신부는 한센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한센인은 문둥병, 나병에 걸린 환자를 뜻한다. 이 신부는 한센인의 마을 ‘라이촉’에 자주 들렀다. 발 모양이 제각각 다른 한센인을 위해 맞춤형 신발을 만들어 선물했다. 이태석재단 구수환 이사장은 “이태석 신부는 수단 안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한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상처를 보듬고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시간만 나면 라이촉 마을을 찾아갔다”고 전했다.
■교회보다 먼저 세운 학교
이 신부는 선교사 자격으로 왔음에도 교회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다. 그는 저서에서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톤즈에서 초, 중, 고등학교 12년 과정을 모두 가르치는 유일한 학교를 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직접 음악을 가르쳤다. 전쟁과 가난을 겪고 있는 톤즈 아이들에게 총 대신 악기를 쥐어 주고 기쁨과 희망을 전하기 위함이다. 악기를 가르칠 선생을 구할 수 없자, 직접 악기를 배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35명의 아이를 모아 남수단 최초의 악단 ‘브라스 밴드’를 만들었고, 창단 불과 1년 만인 2006년에 수단 정부 행사에 초청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톤즈에서 왕성히 활동하던 이태석 신부는 2008년 10월 휴가차 귀국했다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4기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때조차 의사에게 ‘톤즈에서 우물을 파다 와서 돌아가야 한다’며 자기 몸보다 톤즈를 걱정했다.
이태석 신부는 투병 중에도 자선 공연을 통해 톤즈에 대한 봉사활동과 지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결국 암이 간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2010년 1월 14일 오전 5시 35분 ‘Everything is good’이라는 유언을 남긴 채 48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의 선종 이후 KBS 제작진이 그의 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톤즈를 찾았다. 딩카(남수단 민족)의 전사들은 눈물을 수치로 여기지만, 이 신부의 선종 소식을 들은 수많은 톤즈 사람은 그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쏟아낸다. 이후 2010년 9월 ‘울지마 톤즈’ 영화가 개봉해, 44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이 신부의 선행이 대중에게 크게 알려졌다.
이 신부가 선종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태석신부기념관 이세바 관장은 “의사가 돼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려운 곳에 가서 헌신한 모습이 모두에게 충격과 교훈을 함께 준 것이 아닐까 한다”고 언급했다. 이태석재단 구수환 이사장은 “존경받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봉사와 나눔에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준 이태석 신부. 그가 보여준 섬김과 봉사, 헌신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