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철수와 잔류 사이

배동진 기자 dj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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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진 서울경제팀장

러-우전쟁 장기화…국내 기업 철수 임박
현대차 공장 카자흐 기업에 매각 논의
삼성·LG전자도 거래선 유지 안간힘
중국, 대만 침공 조짐…기업들 또 철수?

‘전쟁은 경제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이곳이 옥수수와 밀 등 세계 3대 곡창지대인 데다 전기차 원료를 포함해 전 세계 광물 자원의 5%가 매장돼 이를 노렸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 중세-근대 유럽에선 전쟁으로 적국의 생산을 빼앗아 오는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21세기에도 그런 목적으로 전쟁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지만 전쟁은 어떤 배경에서든 일어났고 현재진행형이다.

러-우 전쟁이 1년 넘게 장기화되면서 러시아와 교역을 해온 국내 대기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와 토요타, 애플, 맥도날드 등 글로벌 주요 기업들이 대부분 철수한 상황이지만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이곳에서 높은 점유율을 자랑하면서 수익을 낸 터여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76개 주요 그룹의 러시아 법인은 지난해 기준 63곳이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의 법인이 18개로 가장 많고, 삼성과 롯데도 각각 9개의 법인을 운영 중이다. LG, CJ, SK, 두산, KT&G, HMM 등도 2개 이상 법인이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등은 현지에 대규모 생산공장까지 운영 중이어서 피해가 적지 않다.

하지만 국내 주요 기업들은 이곳 공장 가동을 멈추거나 구조조정을 하면서도 철수는 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경우 법인 철수 후 상황이 개선될 경우 다시 설립하기가 쉽지 않고, 전쟁이 이웃국가로 확전이 되지 않고 있어 갑자기 휴전 내지 종전 가능성도 있어서다. 이에 기업들은 상황이 개선되기를 기다리면서 버티기 전략을 써왔다.

하지만 전쟁이 곧 끝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1년을 넘기면서 기업들은 초조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지원 가능성을 시사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 러시아 정부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이곳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은 좌불안석이다. 기업들은 최악의 경우 러시아가 현지 진출한 한국 기업을 제재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철수에 가장 큰 고민인 기업은 현대차다. 한때 러시아 내 수입차 판매 1위를 달릴 정도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현대차그룹이 국내 기업 중 가장 많은 법인을 러시아에 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차의 올해 1분기 러시아 판매량은 고작 800대 정도다. 러시아 내에선 현대차가 공장을 카자흐스탄 기업에 매각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현대차도 “매각 협상이 논의 중”이라고 밝힌 상황이다.

현대차 내부에선 “어떻게 이뤄낸 시장인데…”라는 말이 나온다. 수조 원을 투자한 중국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러시아 시장은 뿌린 대로 열매를 거두는 노다지였기에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가전업계도 고민이 많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러시아를 비롯한 CIS(독립국가연합) 지역 매출이 예년에 비해 반토막이 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공장가동을 중단한 뒤 현지 거래선 유지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기업들이 철수를 하고 싶어도 러시아가 그냥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지난 3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비우호국 출신 외국인 투자자의 경우 러시아 철수시 자산 매각 가격의 10%를 연방예산으로 기부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하기로 했다. 상당한 재정적 손실을 감수하고 있는 기업들에게 국가 차원의 ‘떼법’ 내지 ‘어거지’가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중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국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을 공권력을 내세워 막무가내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30~40년 전 자유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서방국가들에게 문호를 여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번 도발에 이어 중국까지 이웃 대만 침공 의사를 내비치는 등 본색을 드러내면서 다시 한번 ‘못 믿을 공산권 국가들’이 됐다.

중국 내 미국 기업들은 이미 미·중 무역갈등으로 상당수 철수한 상태다. 향후 중국의 대만 침공 가시화 시 미국 외 한국 등 다른 기업들의 탈출 러시도 예상된다. 한국 입장에선 러-우 전쟁이 거리나 정치·경제적 교류 등을 감안하면 큰 영향이 없을 수도 있지만 중국-대만 전쟁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닐 수 있다. 알려지다시피 한국의 교역 1위 국가는 중국이다. 지난해 양국 간 교역규모는 미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도 컸다. 우리 기업들이 또 철수와 잔류를 고민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배동진 기자 dj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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