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살고 있는 도시를 사랑하는 법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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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규 해양수산부장

개항 147년 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온 부산항
시민 사랑받는 랜드마크로 다시 디자인할 기회
개인 친밀한 경험과 공동체의 과제 원칙 돼야

부산역 2층 맞이방 뒤쪽 문을 열자 탁 트인 잔디광장이 나왔다. 멀리 부산항대교와 발 아래 복합환승센터 공사 부지를 보면서 왼쪽 공중보행교로 들어서니 맞은편에서 캐리어나 여행가방을 든 사람들이 우르르 밀려왔다. 일본에서 여객선을 타고 들어온 여행객들이다. 부산역에서 버스로는 빙 둘러가는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이 금방 나타났다. 터미널로 가는 대신 반대 방향 끝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면 곧바로 북항 친수공원이다.

북항 친수공원은 북항 재개발 1단계 구역 공공시설 중 하나다. 지난 4월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인근 옛 부산항 3부두 구간을 먼저 전면 개방했다. 부산항만공사는 1876년 개항한 부산항이 147년 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삼엄한 보안 구역이었던 부두를 누구나 거닐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비가 흩뿌리는 궂은 날씨에도 경관수로변 산책로를 따라 남녀노소가 각각의 속도로 걷고 있었다. 수로에는 축제용 오리와 달 모양 보트가 유유히 오갔다. 조망언덕과 수로 위 보도교에서는 북항과 부산항대교, 영도까지 파노라마 조망이 펼쳐졌다.

부산항은 부산의 랜드마크다. 역사성과 공공성을 갖춘 도시 상징물로 부족함이 없다. 중요성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전국 무역항 컨테이너 물동량의 76.6%가 부산항을 거쳤다. 수출입의 62.7%, 환적의 96.8%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80% 안팎이 수출입에서 나오고, 우리나라 수출입의 99% 이상이 항만을 통한다. 부산항 없이는 국가경제뿐 아니라 우리 일상도 멈춘다.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 세계 2위 환적 항만인 부산항은 국제적 위상으로 보면 부산보다도 높다. 부산이 곧 부산항이라 할 만하다.

모든 시민이 그 도시의 랜드마크를 사랑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보통 사람들에게 부산항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존재다. 철도와 도로와 부두의 담장이 도심과 부산항 사이에 벽을 세웠다. 항만을 드나드는 대형 화물차는 ‘도로의 무법자’로 눈총을 받았다. 선박이 내뿜는 매연도 항만을 ‘혐오시설’로 만들었다. 멀찍이서 지나치는 거대한 크레인과 컨테이너 탑은 삭막하고 위압적이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이나 ‘낭만의 마도로스’조차 이제는 보기 쉽지 않다. 랜드마크가 품은 이야기도 희미해졌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를 인용하자면 부산항은 우리에게 공간이지만 장소가 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책은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것으로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을 든다. 낯선 도시는 처음에는 잘 알지 못하는 공간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낯설고 의미없는 추상적 공간에서 익숙하고 의미로 가득찬 구체적인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 때 시간의 지속만큼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특히 개인적이고 친밀하고 미묘한 경험이 공간에 의미를 불어넣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에는 두 가지 상반된 예가 나온다. 한 소설 속 십대 소년은 텍사스 중부 평원의 작은 마을 벨베디어의 자랑을 말하면서 일몰 시간 고속도로 가로등에서 증기를 머금고 퍼지는 불빛을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열띠게 묘사한다. 반면 파티에서 미니애폴리스의 장점을 묻는 질문에 대한 성의 없는 대답에는 이 ‘경험’이 빠져있다. “좋은 도시죠. 살기에 좋은 장소예요. 단,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겨울만 빼면요.”

우리가 사는 도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다행히 부산항이라는 랜드마크를 다시 디자인할 기회가 있다. 북항 재개발 사업의 제일 원칙은 시민 누구나 평등하게 만나는 개방성이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꿈꾼 “시민들이 슬리퍼를 신고 아무 때나 가볼 수 있는 부산항”이다. 북항 친수공원 해양문화지구 랜드마크 부지에 만든 야생화단지에는 유채꽃이 지고 금계국이 피었다. 단지를 지나면 어느새 부산항대교가 눈앞이다. 중년여성 둘은 선베드에 누워서, 모자는 반려견과 나란히 앉아 발밑에 찰랑이는 파도를 보고 있다.

북항 재개발 지역은 아직 골조 단계인 오페라하우스와 마리나센터 부지를 지나 연안여객터미널과 부산항 1부두 창고로 이어진다. 60년대 파병 장병의 환송식이 열린 3부두, 한국전쟁 당시 군수 물품을 하역한 2부두를 지나 해방 직후 140만 명 동포가 귀환한 1부두까지 거슬러왔다. 공동체는 부산항에서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어떤 미래를 함께 꿈꿀 것인가. 이 질문이 두 번째 원칙이 될 때 부산항은 다시 사랑받는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 이제 시작된 북항 재개발 사업이 살고 있는 도시를 더욱 사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시민과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댈 때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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