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시절에 맞는 각각의, 다양한 힘이 필요하다
각각의 계절/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실버들 천만사’ 등
예상 못한 계절 다룬 7편 단편소설
“새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 길러내길”
권여선의 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필요하다’라는 전언을 울림 있게 전한다. 7편이 한데 묶였다. 작가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 ‘어떤 힘은 딱 그 시절에만 필요했던 것인데… 우리가 한 생을 살아내려면 한 힘만 필요한 게 아니라 각각의 시절에 맞는 각각의 힘들, 다양한 힘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개인의 경우, 생애의 사계에 맞는 각각의 힘이 필요하고, 사회 역사적으로 볼 때도 시대 국면에 따라 적당한 각각의 힘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예상치 못한 ‘어떤 계절’을 맞닥뜨린다.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에서처럼 젊은 시절에 운동을 했던 어떤 이는 나중에 동지를 배반하는 변절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승만을 욕하다가 이승만을 찬양하는 식으로 신조를 바꾸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에게 ‘나 어떻게든 이래’라는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37쪽)이 애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36쪽) 변절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애초부터 변절의 욕망은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걸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면 민주화 달성 이후 보혁의 정권과 촛불혁명을 거친 뒤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선, 일련의 현재적 과정에는 ‘우리가 지나온 행로 속에 존재했던 불가해한 구멍’이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긴 안목은 반대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지나가고 난 뒤 그것이 무엇인 줄 뒤늦게 아는 경우가 그러한데, 희망 속에 절망이 내재했듯 절망 속에 지나쳐버린 희망의 목록도 있었다는 것이다. 단편 ‘기억의 왈츠’는 절망의 젊은 시절 상대에게서 받았던 큰 위로를 뒤늦게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 뒤늦은 깨침이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241쪽)라는 현재적 발견으로 이어져 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단편 ‘하늘 높이 아름답게’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인간은)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114쪽)이다. 작중 인물 베르타는 그러한 성찰적 명제를 던진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암에 걸려 죽는 마리아는 ‘애초에 없던 목숨인데 이렇게 태어나서 살았으니 됐고 살아서 좋은 때도 있었으니 됐지요’(95쪽)라는 말을 남긴다. 독자를 두 명제 사이를 오르내리도록 하는 것이 이 작품이다.
단편 ‘실버들 천만사’는 여행에 나선 딸과 엄마를 등장시킨다. 부부의 이혼으로 딸과 엄마는 헤어져 산다. 딸이 묻는다. “사랑하는 게 왜 좋고 기쁘지가 않아?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야?”(77쪽) 즉답을 할 수 없는 엄마는 내내 생각하다가 밤에 다음 생각에 이른다. ‘사랑해서 얻는 것이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79쪽) 소설 속 명제는 딸과 엄마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사랑은 힘든 것이고, 차라리 그 힘듦을 통과하는 게 사랑이라는 울림을 낳는다.
단편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는 ‘전생에 진 빚’이란 뜻으로, 사전에 없는 단어 ‘원채’를 말한다. 그 ‘원채’는 여러 가지인데 돈으로 진 빚이 ‘전채’, 정으로 진 빚은 ‘정채’, 몸으로 진 빚은 ‘육채’, 남의 목숨을 빼앗은 빚은 ‘명채’, 의리를 저버린 빚은 ‘의채’라고 한다. 살다보면 가족간, 남녀간, 친구간, 동기간에 어떤 빚의 색채가 꽤 실감 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단편 ‘무구’는 젊어서 두려울 수 있고, 돈이 없어 두려울 수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특히 ‘사람은 절대 그렇게 무구하지 않다’는 생각을 모티브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작가는 “새로운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을 길러내시기 바란다”고 적었다. 권여선 지음/문학동네/276쪽/1만 5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