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전 비극의 증언록 "그런 지옥이 또 어디 있을까" [8000 원혼 우키시마호 비극 ①]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 김보경 PD harufor@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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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78년 전 비극의 증언록

8000명 숨진 우키시마호 폭침
유골조차 흩어지고 잊힐 위기
그날 기억할 역사적 공간 위해
본보, 서일본신문과 공동 기획

1995년 10월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작성한 우키시마호 사건 생존자 81명의 개인기록부를 <부산일보> 취재진이 분석하고 있다. 기록부에는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경위, 우키시마호 승선과 폭침 당시 상황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1995년 10월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작성한 우키시마호 사건 생존자 81명의 개인기록부를 <부산일보> 취재진이 분석하고 있다. 기록부에는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경위, 우키시마호 승선과 폭침 당시 상황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1945년 8월 24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강제동원 한국인을 태운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4730t급 거함은 돌연 뱃머리를 돌려 그곳으로 향했고, 의문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수천 명의 한국인이 수장됐다. 일본이 발표한 한국인 공식 사망자는 524명. <부산일보>와 <서일본신문>은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및 옛 오미나토 해군시설부의 우키시마호 희생자 명단을 각각 단독 입수해 번역했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실제 사망자는 최대 8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2023년 8월 8일. 78년이 흘렀지만 그들은 죽어서도 고향을 찾지 못한다. 탈출하고자 몸부림쳤던 일본 땅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배는 고철로 팔렸고, 대부분의 유해는 주변에 집단 매장되거나 바닷속에 잠겼다. 50년 전 각계의 노력 끝에 국내로 반환된 유골조차 뿔뿔이 흩어졌다.

<부산일보>는 자매지 <서일본신문>과 한일 지역언론사 최초의 공동기획으로 일본에 남은 유골을 되찾고 ‘잊힐 위기’에 놓인 우키시마호의 마지막 기록을 남긴다. 이미 봉환된 유골도 한데 모아 ‘그날’을 기억할 역사적 공간이 마련되길 바란다. 현 정부의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풀어야 할 실타래다. 목적지 부산항을 향한 우키시마호의 마지막 항해다.

“제 나이 여든한 살입니다. 죽어서 아버지를 뵈면 적어도 ‘유골은 고국의 금수강산에 모셔뒀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유족 한영용 씨)


1995년 12월 천안시에서 열린 우키시마호 사건 증언대회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생존자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제공 1995년 12월 천안시에서 열린 우키시마호 사건 증언대회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생존자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제공

“그런 지옥이 또 어디 있을까?”

1995년 12월 2일 오전 10시, 충남 천안시 시민회관 강당은 북적였다.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이 일어난 1945년 8월 24일 이후 처음 전국 규모의 생존자 증언대회가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주최로 열렸다. 침몰한 배에서 살아남은 스물세 명이 이곳을 찾았다. 50년 만에 만난 생존자들은 서로 뒤늦은 인사를 나눴다.

천안에서 열린 증언대회 후 28년 만에 다시 그들을 찾아 나섰다. 확인된 생존자는 단 두 명. 뒤늦게 전한 안부는 부고로 돌아왔다. 지팡이를 들고 과거 증언대회를 찾았던 초로의 생존자들은 이제 세상에 없다. 1995년의 모임이 최초이자 마지막 생존자 증언이 됐다. <부산일보>는 진상규명회로부터 당시 증언록과 생존자 81명의 개인기록부를 입수했다. 그날의 증언록 중 일부를 최초로 공개한다.

 

장영도(1933년 6월 7일생·광주 동구 학동)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1945년 8월 15일 온 식구는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나는 해방, 독립이 무엇인지 몰랐다. 누나는 한복 그림을 보여주며 우리나라가 식민지 수탈을 당하다 주권을 되찾았다고 설명해 줬다. 그제야 모두 만세를 부른 이유를 알게 됐다. 남자는 배 위쪽, 여자와 어린이는 배 아래쪽에 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누나, 여동생, 어머니와 아래쪽 선실에 자리를 잡았다. 지루하면 배 위쪽의 형과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다시 선실로 돌아가며 이틀을 보냈다. 24일 오후 5시쯤 누군가 “육지다”라고 외쳤다. 여동생과 갑판에 나가려 했지만, 어머니가 ‘위험하니 나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라고 타일러 여동생은 도로 앉았다. 잠시 뒤 ‘쾅’ 하며 폭발 소리가 났다. 바다는 이미 기름으로 덮여 아비규환이었다. 뭍에 나와 형은 만났지만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위험하니 나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고 하신 말씀은 어머니 유언이 됐다.”

 

김동연(1921년 10월 19일생·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1동)

“우키시마호 승선이 시작되기 직전 조선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모두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에 넘쳐 있었다. 폭파 당시, 쾅 소리와 함께 장롱 높이만큼 튀어 올랐다. 나는 엉킨 사람들 사이를 지나 구조선을 타고 나왔다. 침몰 다음 날 인근 마을 바닷가에는 시체가 말도 못 하게 많았다.”

 

정기영(1927년 9월 21일생·충남 천안시 사직동)

“항해 중 한국인 여성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본 일본 해군 병사가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겠구나’라고 말했다. 나는 침몰 이후 판자를 잡고 헤엄쳐 나왔다. 침몰하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죽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 젊은 생명이 수없이 죽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이철우(1927년 4월 25일생·충남 아산시 배방면)

“구조에 나선 배는 작기도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이 달라붙어 뒤집히기 일쑤였다. 서로 부둥켜안고 밧줄에 매달렸다가 맨 위 사람이 줄을 놓치면 바닷속으로 몽땅 빨려 들어갔다.”

 

주윤창(1926년 4월 5일생·전남 여천시 신기동)

“마이즈루만에 들어서자 갑자기 폭발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선체 벽이 무너지며 가라앉고 있었다. 바닷속 기름이 온몸에 묻고 아수라장이어서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벌거벗기 일쑤였다.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임창문(1928년 7월 29일생·충남 천안시 광덕면)

“아버지한테 징용 영장이 나와 내가 대신 갔다. 50m가량 헤엄쳐 나오는데 구조선이 다른 곳으로 가기에 허우적거리며 소리쳤더니 내게로 왔다. 선실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은 셀 수도 없었다. 모두 죽었을 것이다. 비명에 간 동포들과 어린 생명들 앞에 죄스럽기만 하다.”

 

이기출(1920년 2월 28일생·충북 영동군 심천면)

“잠시 뒤 또 ‘쾅’ 하며 두 번째 폭발 소리가 났다. 바다는 새까만 기름으로 덮였고 사람들은 살려 달라며 아우성쳤다. 그런 지옥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살아 돌아왔으나 죽은 동포들의 시신이라도 찾아 양지바른 곳에 모셔야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 김보경 PD harufor@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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