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는 동양화 수백 점, 오리고 붙이면…
이창진 ‘통계학적 미술사’ 전
버려지는 동양화 수백 점 수집
이미지 활용 콜라주 작품 탄생
기존 동양화와 다른 유쾌함과
숨겨진 이미지 찾는 재미 선사
그동안 입체 작품과 설치 작업을 주로 선보였던 이창진 작가가 뜬금없는 전시 초대장을 보냈다. 동양화 같은 그림들, ‘통계학적 미술사’라는 전시 제목, “이번 작업의 시작은 당근마켓이었습니다”라는 인사말. 설치 작가의 회화전? 전시 제목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통계학? 무슨 당근마켓?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초대장을 받은 그 날 이창진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예술지구P로 달려갔다.
예술지구P 2층 복도에는 수십 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낡은 액자들이 쌓여 있었다. 이번 작업에 대한 힌트를 주는 듯하다. 궁금한 것이 많아 여러 개의 질문을 쏟아냈더니 이 작가는 “몸은 고되지만, 굉장히 재미있어요. 아마도 이 작업은 계속 이어질 것 같아요”라며 느낌부터 말한다. 동문서답이 돼 버렸지만, 그만큼 이번 작업에 대한 애정이 전해진다.
작업의 시작은 우연한 계기였다. 넉넉지 않은 작가의 삶 때문에 평소 중고거래앱을 자주 이용했다. 별의별 물건들이 다 올라오고 어떤 것들이 요즘 인기가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특히 무료 나눔 코너를 보면 어떤 것들이 쓸모없는지 시대상도 짐작할 수 있단다.
그러다 작가의 감각을 자꾸 자극하는 물품이 있었다. ‘그냥 가져가세요’ 혹은 몇천 원대 싼 가격으로 올라오는 동양화 작품들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 사무실 벽, 친구네 집 나무색 거실 벽, 어느 집 안방 벽에 있었던 것 같은 그림이었다.
“익숙하게 주변에 있던 것들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사라지는 물건 중 유독 동양화에 꽂혔던 건 제가 작가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언젠가 내 작업도 지금의 동양화처럼 아무나 들고 가라며 어딘가 놓여있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죠. 동양화로 뭘 하겠다는 생각도 하기 전 애물단지가 된 그림들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죠.”
그렇게 2022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8개월 동안 부산 지역에서 200점가량의 액자, 병풍, 족자를 모았다. 목단, 정물, 이름 모르는 꽃, 다양한 필치의 산수, 풍경, 도인, 새와 호랑이, 백 마리 학 등 정말 다양한 동양화들이 작가 품으로 들어왔다. 이 작가는 그림 속 이미지를 일일이 오려내고 새 캔버스 위에 다시 붙여 콜라주 형식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익숙한 동양화 이미지들은 이 작가를 통해 새로운 그림으로 탄생했다. 부리부리한 눈, 털이 솟은 호랑이가 알록달록한 잉어를 안고 있는가 하면 다양한 필치의 산들이 한 그림에 다 들어있다. 담소를 나누는 도인들 주변에는 수풀이 우거진 시내·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가득하다. 이번 전시에선 8미터 크기의 대형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마치 이 작가만의 새로운 세계가 창조시킨 듯하다.
“이렇게 해도 되요?”. 기존 동양화 문법을 무너뜨린 작품에 대한 첫 반응이었다. 한편으론 유쾌하고 발랄한 동양화의 탄생일 수도 있다. 물론 작가에게 이 작품은 동양화가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이미지일 뿐이다. 많은 이미지를 어울리게 녹여낸 건 작가의 내공이다. 관객은 동양화에선 느낄 수 없는 요소를 찾는 재미가 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하는 기분이다.
“그림을 모으다 보니 주제와 구성, 액자 형태, 재료, 내부 목재 구조, 한지의 종류, 안쪽 덧대어져 있는 신문까지 의도치 않았는데 정말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는 겁니다. 통계학이 떠올랐어요. 이 작업이 사라지는 시대의 기억을 통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작가가 설명한 이번 전시 제목의 의미이다. 이창진 작가의 ‘통계학적 미술사’ 전시는 12월 3일까지 금샘 미술관에서 열린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