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1598년 겨울 노량
노량(露梁)은 남해에도 있고, 하동에도 있다. 경남 하동군 금남면 노량은 육지 쪽이고, 남해군 설천면 노량은 섬 쪽이다. 노량의 량(梁)은 ‘해협’을 뜻하는 말로 육지 사이에 끼어 있는 좁고 긴 바다를 말한다. 칠천량, 견내량, 명량의 량은 모두 이런 의미다. 노량 앞바다의 물살이 거세고 빠른 것도 이 때문이다.
‘1598년 음력(이하 생략) 8월 18일.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왜군 수뇌부는 서둘러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해 철수를 서두른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조선을 빠져나가는 왜군에 대해 추호의 연민과 동정도 없었다. 당시 왜군은 울산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퇴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순천왜성에 주둔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도 철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고니시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순신에게도 사자를 보내 살아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단호했다. 이미 싸울 것을 결심하고 배를 출항시켰다. 이에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산의 데라자와 마사시게 등이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를 구출하려고 대규모 함대를 결성해 남해로 집결한다. 노량해전을 앞둔 전날 밤, 이순신은 이렇게 기도한다. “만약 이 원수를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선조 31년(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밤. 이순신은 차가운 겨울 바다 노량에 있었다. 60여 척의 조선 함대와 진린 휘하 200여 척의 명 함대가 함께했다. 조선 함대는 남해 관음포에, 명군은 인근 섬에 진을 쳤다. 왜군의 함대 규모는 무려 500여 척이나 되었다. 이날 왜군은 400여 척이 불타거나 격침 또는 분파, 나포되고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며 대패한다. 조선의 수군도 피해가 있었다. 이순신은 적의 총탄을 맞고 “지금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라는 말을 남기고 순국한다. 10여 명의 조선 장수도 전사한다.’
노량해전을 그린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가 개봉 4일째인 지난 23일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이 영화는 ‘명량’(2014) ‘한산: 용의 출현’(2022)에 이어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영화 ‘노량’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우린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또한 부당한 침략에 대응하는 ‘올바른 전쟁의 종결’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영화 ‘노량’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