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윤흥신 장군 동상 건립, 역사 정신을 바로 세운 일
윤한표 윤흥신 기념사업회 회장
갑진년 새해 벽두에 부산 동구에서 윤흥신 장군 동상을 건립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동상은 기존 녹물이 흐르던 석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 세워졌다. 윤흥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다대포 전투에서 순절한 인물로 정발 장군, 송상현 부사와 함께 부산의 임진왜란 3대 명장으로 꼽힌다.
이번에 동상이 건립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기존 석상은 정발 장군 동상과 송상현 부사 동상이 건립된 이후 1981년 만들어졌다. 당시 시민들에게 좀 더 친근감을 주기 위해 석상으로 건립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철골에서 흘러나온 녹물로 석상 곳곳이 얼룩졌고 바닥 타일마저 파손되면서 안전성 문제가 불거졌다. 이 때문에 동상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일부에서는 다대포 전투에서 순절한 만큼 다대포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논의는 2015년부터 지속됐지만 예산 확보가 어려운 데다 다대포에 마땅한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녹물이 흐르는 영웅의 석상이 부산의 중심인 중앙대로 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다행히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영웅에 대한 예우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당시 시의원이었던 김진홍 동구청장이 동상 건립에 필요한 시비 6억 원을 확보하면서 물꼬를 틔웠다. 예산 문제를 일단락 지으니 장소 문제가 불거졌다. 다대포 전투에서 순절했고 장군을 기리는 윤공단이 다대포에 있으니 다대포로 이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다대포에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해결점이 보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동구민들이 기존 석상이 있던 자리에 동상을 건립하자는 대승적 결단을 내려준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다. 장군은 다대포가 아니라 부산을,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킨 영웅이기에 동상 건립 장소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동구민들의 큰 생각이 수십 년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장군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아버지 윤임과 어머니 현풍곽씨 사이에 파평윤씨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조선 명종 때 을사사화로 아버지와 형이 처형당하고 당시 어렸던 장군은 동생들과 함께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다. 32년이 흐른 뒤 을사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의 신분이 회복되면서 장군도 양반 신분을 되찾아 진천현감, 진도군수를 역임한 후 다대진 첨사로 부임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 아우 윤흥제와 함께 적은 병력으로 분전하여 왜군을 격퇴했다. 전사 연구자들이 말하는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자를 소비한 조선군은 다음날 다시 왜군의 재공격을 받아 모두 순국했고 장군은 아우 윤흥제와 함께 성에 남아 끝까지 활을 쏘다가 전사했다.
이번에 건립된 장군의 동상은 백척간두의 위기 속에서도 종일토록 활을 쏘다가 죽음을 택한 결의에 찬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오른손은 주먹을 꽉 쥐고, 왼손은 활을 들고 북항을 바라보고 서 있는 장군 동상은 부산 앞바다에 다시는 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는 듯하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장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소중함을 전해준다. 위기 상황에도 개인의 목숨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던 장군과 같은 영웅이 역사 속에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
해마다 동상 건립이 예산 문제로, 장소 논란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항상 무거웠다. 나라를 구한 역사적 영웅을 끝까지 잊지 않고 예우해 준 동구의 노력으로 난제를 이제야 푼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장군의 후손으로서 그동안 열과 성을 다해 힘써 준 동구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이번 동상 건립을 계기로 윤흥신 장군이 대한민국 수군의 표상으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