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는 왜 “그 약 니가 한번 먹어 봐라” 했을까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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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 / 김철권

동아대병원 정신과 김철권 교수
37년간 환자와 나눈 이야기 기록
총 4권 1400여 쪽 소설처럼 담아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 3권 표지에 실린 사진. 김철권 교수가 2010년 모로코 여행 중 사하라 사막에서 찍었다. 안목 제공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 3권 표지에 실린 사진. 김철권 교수가 2010년 모로코 여행 중 사하라 사막에서 찍었다. 안목 제공

나이 탓인지 모르겠지만 자주 눈시울이 붉어졌다.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났다.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은 도합 1400쪽이 넘는 총 4권의 책에 360개의 이야기가 실렸다. 정신과에 대한 이론서는 많지만 사례를 바탕으로 쓴 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드물다. 의료인으로서 비밀 엄수가 요구되는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동아대병원 정신의학과 김철권 교수도 침묵하려고 했지만, 말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곧 의무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환자 본인들에게 직접 책의 취지를 설명해 허락을 구하고, 재구성해 환자를 특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진료실에 들어온 중년 부인에게서 악취가 진동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아서 그랬다고 한다. 자식 잃은 아픔은 동물적 본능의 슬픔이다. 김 교수는 이럴 때 말의 한계를 느낀다고 했다. 귀를 닫고 싶을 정도로 비극적인 사연들을 마주해야 하니 고달픈 직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잘 들어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상대가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된다.

슬픔 속에 피어나는 쏠쏠한 재미도 있다. 김 교수를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애인이라고 말하고 다닌 ‘밀양 할머니’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앞이 뿌옇고 이상해서 이제는 드디어 죽었다고 생각했던 분이다(백내장이었다). 어느 날 그의 장남이 찾아와 할머니의 부고를 전하며, 할머니가 김 교수에게 남긴 봉투를 건네고 간다. 그 봉투 속에 무엇이, 또 왜 그만큼만 들었는지 정신분석학적으로 이유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1권 ‘죽은 아들 옷을 입고 자는 여자’는 잔인한 삶의 상처로 가슴에 구멍이 뚫린 환자와 나눈 슬픈 사연들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삶은 곧 애도의 과정이라고 한다. 잃어버린 사랑에 매달려 사회적인 역할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는 교훈을 일깨워 준다.

2권 ‘무지개 치료’는 37년간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한 다양하고도 독창적인 치료 방법들이다. 거친 욕을 하는 남자에게는 동요 부르기를 과제로 내주고, 마술과 타로까지 배워서 활용하는 정성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때로는 환자를 건성으로 대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부분이 감동적이다.

3권 ‘사람들의 가슴에는 구멍이 있다’는 결핍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는 ‘존재 결핍’이 있는데 그것을 ‘소유 결핍’으로 잘못 알고 채우려고 욕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이다. 소제목 ‘사랑하는 곳에서는 욕망하지 않고, 욕망하는 곳에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명언이다. 김 교수는 자신도 그 구멍에 술·사진·영화 등 넣어 보았지만 다 소용이 없었고, 지금은 그 구멍을 그저 바라본다고 말한다.

4권 ‘나는 항구다’는 저자의 철학을 담았다. 정신과 약을 다 먹어 보는 정신과 의사라는 부분은 최고였다. 환자들이 먹고 불편하다고 호소하는데 어떻게 불편한지 얼마나 불편한지 알아야 소통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김 교수는 아무도 모르게 주로 주말을 이용해 복용한단다. 가끔 다른 병원에서 치료받다 온 환자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약을 높은 용량으로 처방한 것을 볼 때가 생긴다. 그럴 때 김 교수가 하는 말이 있다. “니가 먹어 봐라, 한번."

김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어렸을 때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유언대로 의대에 가서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부산대 재학 중에는 소설로 부대문학상을 받았다. 추천사에서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37년이 흐른다고 모든 의사가 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다. 소중한 텍스트 역할을 할 수 있으니,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은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의사들이 환자들의 이야기를 제발 좀 잘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럴 여건이 빨리 만들어지길 소망한다. 김철권 지음/안목/1408쪽/7만 2000원.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 1~4권 세트. <한 정신과 의사의 37년간의 기록> 1~4권 세트.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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