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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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화평론가

한 배우가 죽었다. 그는 좋은 목소리를 지니고, 늘 노력하는 배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어야 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은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를 지금까지 되새길 수밖에 없다. 혹자는 그가 공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어떠한 것도 공개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배우는 공인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 공인(公人)의 의미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용례로 “공무원은 공인으로서 자기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니 분명 공무원은 공인일 것이다. 하지만 배우가 반드시 ‘공인’일 필요는 없다.

'신상털이'가 부른 배우의 죽음

아픔 나누는 공동체 의식 부재

원인 되짚고 대책 고민해야

배우는 공인이 아니라는 말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배우들도 흔히 자신을 공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가 하는 일은 연기이고, 연기는 그 연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니 배우는 해당 연기를 원하는 이들만을 위한 한정된 일을 하는 사람일 따름이다.

배우가 공인이 아닌 것은 장사하는 사람이 공인이 아니고, 사기업을 다니는 사람이 공인이 아닌 것과 같다. 상인과 회사원이 공인이라면, 세상에는 공인이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배우가 공인이어야 한다면, 모든 사람이 공인일 터이니, 굳이 공인이 ‘신상털이’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죽은 배우가 공인이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알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자연스럽게 허위가 된다.

한 사람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난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죽은 배우의 출연작 ‘나의 아저씨’에도 시련과 고난이 절절하게 나온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중년 남성의 삶과 비애도 그대로 묻어나온다. 어쩐 일인지 그만한 시련과 고통이 그에게 현실이 되었고, 진짜 삶에도 그대로 묻어나왔다. 하지만 배우는 드라마 속 세상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견디지 못했다.

‘나의 아저씨’에는 공동체의 정신을 굳건히 지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축구를 함께하고, 저녁과 술을 함께하고, 장례와 아픔을 함께한다. 그러나 현실에는 공동체가 없었다.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다’라는 박동훈(극 중 주인공)의 중얼거림은, 없는 일까지 만들어서, 그것도 아무 일도 아닌 일을 큰일로 만들고 나서도, 결국 공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가해자들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했다. 가해자들은 알 필요 없는 일까지 기어코 알고자 했으며,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을 중대한 일처럼 만들고자 했다. 경찰도, 검찰도, 언론도, 독자도, 누리꾼도, 수다꾼도, 우리도 모두 공범이다.

자고로, 배우는 아픔을 겪고 그 아픔을 다독인 경험으로 다친 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고통스러운 직업이어야 했다. 부와 인기만을 누린다고 믿는 잘못된 속단과 달리, 마음속에 고통을 한가득 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고통을 앓는 이들에게 사적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이어야 했고, 상처입은 이들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은밀하게 보듬어주는 이들이어야 했다. 그러니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까지 그들의 삶과 얼굴이 일일이 공개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한 사람이 죽었고, 4개월 하고도 2주가량 시간이 흘렀다. 한 배우가 탄생하고 연기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일이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를 함부로 다루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을 보유했다고 해서, 그들을 내키는 대로 상처입힐 수 있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이 넓은 세상에서 혼자인 것처럼 죽어야 하는 누군가가 다시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배우를 향한 우리의 폭력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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