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훔쳐보기와 노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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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김세휘 감독 영화 '그녀가 죽었다'
훔쳐보는 남자와 보여주는 여자
소재로 우리 사회의 병폐 드러내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컷. 영화사 콘텐츠지오 제공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컷. 영화사 콘텐츠지오 제공

영화를 보는 이유를 하나만 꼽자면 내가 모르는 타인의 삶을 훔쳐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극장의 불이 꺼지면 ‘나’는 지워지고, 스크린 속 주인공들에 몰입한다. 그들의 일상을 훔쳐보는 것을 통해 쾌락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시대에는 훔쳐볼 것들이 넘쳐난다. 드라마나 영화는 숨기지 않고 관음증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SNS는 사회적 관계망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훔쳐보는 것을 용인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쾌락이 넘쳐나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여기, 자신의 취미가 훔쳐보기임을 당당히 밝히는 남자 ‘구정태’가 있다.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는 고객이 맡긴 열쇠로 빈집에 들어가, 집주인이 알아채지 못하게 집수리를 하는 등 자신만 아는 흔적을 남겨 놓는다. 그리고 그 집에 있었으나 없어도 무방한 물건 하나를 기념품으로 챙겨 나온다. 정태는 타인의 집을 훔쳐봄으로써 그 사람의 민낯 혹은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오직 자신만이 상대의 진실을 엿볼 수 있다고 믿으며 훔쳐보기를 놀이로 즐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한소라‘는 보여지는 삶을 즐기고 보다 많은 관심을 얻기 위해 삶 자체를 연출하는 ‘인플루언서’다. 그녀는 유기견과 유기묘를 돌보는 콘텐츠를 통해 선행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명품을 쇼핑하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등 화려한 삶을 과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SNS 속 그녀는 모두가 선망하고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여성이지만 실상은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되어 있다. 정태가 소라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도 편의점에서 소시지를 먹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SNS에 비건 샐러드 사진을 올리는 모습을 본 이후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짓을 살아가는 여자가 궁금해진 정태는 소라를 훔쳐보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타인의 집에 침입하는 것이 용이했지만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라의 집에 침입할 방도가 없다. 이미 훔쳐보기에 대한 윤리의식이 마비된 정태는 소라를 스토킹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집에 몰래 침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지만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소라가 집을 내놓겠다고 정태의 사무실로 스스로 찾아와 집 열쇠를 건넨다. 마음껏 소라의 집을 들락날락하던 어느 날, 정태는 피투성이로 죽어있는 소라를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정태가 소라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부터 스릴러 영화의 형식을 따른다. 사실 이 영화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듯 익숙한 이야기라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SNS로 야기되는 현대사회의 병폐인 과시욕과 관음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속도감 있게 풀어내는 동시에 소라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연출, 캐릭터의 강렬함이 관객들의 집중도를 높인다. 특히 인물들을 단순히 비호감형으로 만드는 데서 나아가, 그들이 끝까지 죄를 뉘우치지 않는 점이나 타인에게는 냉혹하고 자신에게만 관대한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그려내고 있는 부분은 섬뜩함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나쁜 짓은 절대 안 해요. 그냥 보기만 합니다”, “내가 제일 불쌍해”라는 자신의 서사를 관객들에게 알려주는 해맑은 내레이션은 스릴러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명랑한 방식이라 특이하다. 범죄자의 내레이션은 그들이 직접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에 변명이나 동정으로 읽힐 수 있지만, 거리를 두고 그들을 바라보게끔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김세휘 감독은 영화가 무섭기보다는 경쾌한 스릴러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범죄자들의 내레이션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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