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이름 동판도 슬쩍… 경제 궁핍해지자 ‘장발장’ 급증
교명판·꽃 등 소액 절도 연쇄 발생
IMF 때 맨홀 뚜껑·전선 등과 유사
부산 10만 원 이하 절도 발생 건수
5년간 1만 건 육박 2배가량 늘어
경미한 범죄 감경 사례도 증가세
지난 3월 부산 금정구 서곡로에서 혼자 살고 있던 A(89) 씨는 남의 집 앞에 배송된 택배를 훔쳤다. 택배엔 4만 원 상당의 이불이 들어 있었다. 고령이고 생계가 어려웠던 A 씨는 순간 잘못된 선택을 해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 2월 북구 마트에선 B(69) 씨가 절도를 저질러 경찰에 붙잡혔다. B 씨는 고구마 5점을 비닐봉지에 담아 자신의 가방에 넣은 후에 계산대를 통과하는 방법으로 고구마를 훔쳤다. B 씨가 훔친 고구마는 시가 4950원 상당이었다. 치매에 걸린 B 씨는 끼니를 해결할 돈마저 없어 생계형 범죄를 저질렀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부산에서 소액 절도 사건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로 생활이 팍팍해지면서 1만 원 이하 소액 절도는 5년 새 3배 이상 급증했다. 외환 위기나 금융 위기 같은 경기 침체 시기에 많았던 ‘불황형 범죄’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모습이다.
도로나 공원에서도 절도가 빈발하고 있다.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에서는 이달 들어 거의 매일 튤립 수십 포기가 꺽인 채 발견됐다. 지난 1일에는 에린기움 6포기가 뿌리째 사라졌다. 에린기움은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귀한 식물이다.
경남 진주에서는 다리 이름을 적어 놓은 교명판이나 공사 설명판이 사라지는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 교량 12곳에서 동판 48개가 사라졌다. 구리 가격이 뛰면서 절도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소액 절도나 도로시설 무단 절취 등이 잇따르면서 “IMF나 금융 위기 때가 떠오른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경제 상황이 극도로 나빠지는 시기엔 배수관, 철제 대문, 공사장 철근, 고기 불판 등 돈 되는 것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훔치는 절도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데 요즘 사회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2007년 울산에선 학교 10여 곳에서 밤새 스테인리스 재질 교문이 사라지기도 했다. 맨홀 뚜껑도 단골 표적이었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최근 5년간 부산 소액 절도사건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부산에서 1만 원 이하 절도사건은 2018년 1059건에서 2022년 3646건으로 5년 새 3배 이상 급증했다. 2018년엔 1059건 수준이었으나 2019년 1443건, 2020년 1953건, 2021년 2151건으로 늘었다. 2022년엔 3646건까지 치솟았다. 1만 원 초과 10만 원 이하 절도 사건도 2018년 5582건에서 2022년 9752건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선처하는 사례도 증가세다. 부산경찰청 경미범죄심사위원회가 지난해 감경 결정을 한 절도 피의자는 230명이었다. 경미범죄심사위원회는 생계형 범죄 등 죄질이 경미한 범죄자를 대상으로 즉결심판이나 훈방 조처를 내려 사회 복귀를 돕는다. 20만 원 이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할 것으로 예상되는 형사사건이 대상이다.2019년 94명에서 5년 사이 2배 이상 급증했다. 연도별로는 2019년 94명, 2020년 123명, 2021년 202명, 2022년 249명, 2023년 230명으로 감경 인원이 대체로 증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불황형 범죄’가 증가하는 현상은 경기가 침체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동의대 최종술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범죄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며 “절도 행위 자체는 엄벌해야 하지만, 경미 절도 범죄가 늘어나는 상황을 지표 삼아 차후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 차원에서 불경기에 생계가 곤란한 이들을 선제적으로 구제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