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주술 정치의 비극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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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부족장은 샤먼이었다.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세속의 지도자와 제사장, 무당을 겸했다. 약하디약한 인간이 살아남는 길은 신에게 머리를 조아려 지혜를 빌리는 것. 주술과 무당 같은 영적인 힘에 대한 의존은 그 역사가 뿌리 깊다. 하지만 결말은 대체로 불행한 몰락, 파멸이었다. 점성술과 예언자들을 신봉한 로마의 네로 황제, 러시아 황제를 농락한 요승 라스푸틴, 조선의 명성황후가 애지중지했다는 무녀 진령군 등등. 역사의 페이지에 새겨진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영적인 힘에 대한 의존은 거기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이다. 삶에 대한 철학과 근본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종교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주술과 무속은 이 지점에서 미끄러진다. 미래에 대한 예언을 맹신하게 하고 심지어 구체적 지침과 행동양식까지 점지한다면 십중팔구 가짜다. 사적 욕망의 실현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주술에는 목표의 합리성이나 수단의 도덕성이 없다. 공동체의 선보다 개인의 행복이 우선한다. 그래서 비극의 씨앗이다.

인류는 근대 과학의 이성으로 무지와 몽매의 장막을 걷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주술의 세계는 막강하다.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의 이면에도 망령이 배회한다. 정치인들의 삿된 욕망이 그것과 결합하는 일이 무시로 목격된다. 가장 큰 불행은 국가 최고 통치자의 자리까지 파고드는 주술 정치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 주변에 ‘도사’ ‘법사’ 같은 무속인들이 들락거린 지 오래다. ‘천공’ ‘무정’ ‘건진’ 등 거론된 이름만 해도 4~5명이 넘는다. ‘지리산 도사’로 통하는 정치 브로커 명태균 씨도 포함된다. 모두 정통 불교와는 거리가 먼, 비선 논란의 장본인들이다.

급기야 12·3 계엄 사태에도 역술과 무속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음이 드러났다. 계엄 기획자로 알려진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점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간판에 적힌 이름이 ‘아기보살’이란다. 퇴역한 군인이 군사계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건만, 그게 무속인이라니 더욱 기가 막힌다.

주술 정치는 건강한 판단력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그 해악이 심대하다. 대통령은 다양한 분야의 지혜를 듣고 통합하는 사람이다. 윤 대통령이 주술이 유혹하는 협소한 세계관에 빠지자, 민주국가의 근간은 무너지고 나라 전체가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국정 운영이 사적 욕망에 포획된 결과가 이처럼 엄중하다. 우울한 크리스마스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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