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룡 칼럼] 부산을 사유하는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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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정영선, 박솔뫼, 김숨 세 명 작가 소설
지역에 눈 두고 구체적인 삶 서술

시간 품고, 때론 장소와 사물도 소환
역사적 기억 중첩하며 인식 확장

공간·사람 살아 숨 쉬게 하는 글쓰기
로컬소설의 새로운 가능성 열어 ‘눈길’

지역소설(local novel)이라는 장르가 있다. 로컬에 눈을 두면서 구체적 삶을 서술하는 소설을 지칭한다. 소설이 로컬을 주목한 첫 계기는 일국적 수준의 모순에서 비롯하지만, 국가와 세계가 중층 결정하는 로컬을 자각하면서 주요한 경향이 된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중심부의 주류 문학적 패션을 향한 모방의 욕구를 차단하고 구체적 삶의 진실을 제대로 인식하겠다는 의지와도 결부한다. 이와 같이 자기로부터 글쓰기는 로컬의 신체에 각인된 전통과 근대, 근대성과 식민성, 제국과 민족, 폭력과 희생을 되살려 이야기하는 일인데 멀리 보며 구체적으로 쓰기와 두껍게 쓰기, 다시 쓰기를 동반한다.

먼저 이러한 로컬소설로 정영선의 장편 〈아무것도 아닌 빛〉을 들 수 있다. 이 소설의 무대인 낙동강 유역 부산 북구 금곡동은 현재의 삶을 말하는 장소이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력에 따라 소설의 장소와 공간은 동아시아와 해협을 넘나든다. 오사카 이카이노, 히로시마 단바라, 야마구치, 후쿠오카 등 일본에서의 곤궁한 생존과 영도, 수정동 등 부산의 주변부에서의 생활이 이어지고 겹친다. 제국의 바다를 건너갔다 귀환한 이들과 식민의 질곡을 견뎌낸 이들이 우여곡절을 드러내면서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접면이 두텁다. 로컬의 한 장소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니 고구마 줄기에 딸려 오는 고구마처럼 여러 사람의 삶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정영선은 이 소설을 통해 로컬을 깊고 두껍게 사유하고 국가 시야와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적 기억을 중첩하는 인식을 확장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서사를 직조했다.

박솔뫼의 〈미래 산책 연습〉은 부산근현대역사관 인근의 부원아파트에 세를 들어 살면서 이 일대를 산책하는 이야기이다. 표제가 말하듯이 작가는 걸어서 장소를 구체적으로 감각하면서 어떤 미래를 예감하는 느린 서사를 수행한다. 이런 가운데 부산에서 일어난 사건과 인물을 매개로 광주의 오월을 사유한다. 보행처럼 느리지만 구체적인 지각을 통해 생성하는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런데 박솔뫼의 장편 〈미래 산책 연습〉의 발단은 2020년 부산비엔날레가 기획한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에 실린 단편 〈매일 산책 연습〉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이 소설을 발표하기 이전에 박솔뫼는 2018년 〈인터내셔널의 밤〉으로 부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염상섭의 중편 〈만세전〉의 주인공을 닮았다. 〈만세전〉의 주인공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항 부두에 하선한 뒤에 부산역에서 기차를 갈아타기까지 남은 시간에 부산을 배회했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도 고베에 사는 친구 결혼식에 가기까지 사흘을 부산역 부근 호텔에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산책한다. 특히 부산항 여객 터미널에서 인물들이 만나는 과정은 부산의 특이성을 포착하려는 작가의 의도와 무연하지 않다.

김숨이 부산을 접속한 계기도 2020년 부산비엔날레가 기획한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에 실린 단편 〈초록은 슬프다〉에서 비롯한다. 이 소설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일본이 패전한 후 두 달이 지난 시점에 귀환해 친구들이 남포동 미도리마치(綠町)에 있음을 알고 그들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미도리마치는 1916년 일제가 만든 공창으로 미군정 시절에는 그린 스트리트로 존속하다 1948년 공창제 폐지 이후 완월동으로 잔존하며 1982년 충무동으로 변경된 장소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부경역사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의 도움을 구하면서 녹정, 전찻길, 부산역사, 사십 계단, 용두산 신사, 영도다리, 장수통, 가마보꼬 공장, 낙원, 지장보살 불상 등의 장소와 사물을 소환한다.

〈초록은 슬프다〉에서 시작한 김숨의 부산 쓰기는 장편 〈잃어버린 사람〉으로 발전한다. 서사의 기본 뼈대를 계승하면서 1946년 봄을 지나 1947년 9월 16일 하루를 전체 25부 123장의 규모로 서술한다. 1부 부두에서 출발한 서술은 25부에 이르기까지 동쪽 송정에서 서쪽 낙동강에 이르는 장소와 공간을 종횡으로 교차한다. 이런 가운데 드나드는 사람들의 내력을 세세하게 놓치지 않고 인물들의 삶에 숨결을 부여한다. 이를 두고 활인(活人)의 서사라고 불러도 좋겠다. 시점 또한 마찬가지로 작가는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에 스며든다. 구체적인 장소를 그려내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살려내 한 시대 하루 동안의 거대한 동영상을 창출한다. 미주(尾註)와 감사의 글을 통해 밝혀놓고 있듯이 작가는 ‘해방 전후 부산의 풍경과 생활상이 담긴 사진과 자료들’을 충실하게 참고했다. 달리 말하자면 부산학의 성과를 창작의 동력으로 삼은 셈이다. 지명을 있는 그대로 복원했듯이 그 장소에서 생활하고 부대낀 사람들을 생동하는 인물로 고스란히 그려내고자 했다. 이처럼 김숨의 〈잃어버린 사람〉은 부산의 장소와 기억이 중요한 로컬소설의 가능성임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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