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이후 달라질 세계와 한국의 선택[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린 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슬람권의 패권을 둘러싼 이란·이라크 전쟁 때도 똑같은 에너지 전쟁이 벌어졌다.
1984년 이라크가 이란 유조선을 먼저 공격하면서 ‘탱커(tanker·유조선) 전쟁’이 발발했다. 이란도 바로 보복에 나서 걸프 지역 선박에 미사일, 기뢰, 전투기 공격을 감행했다. 교전 상대국의 석유 수송로를 공격해 수출 경제를 마비시키고 전세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죽기 살기식 극단적 충돌은 급기야 영국 유조선 등 중립국 상선의 무차별 피격으로 치닫는다.
9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반전 시위대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이미지가 담긴 포스터에 불을 붙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서로의 숨통을 죄는 공멸적인 ‘탱커 전쟁’은 오늘날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이후 벌어진 양상과 판박이다. 당시 미국은 에너지 공급망 단절로 세계 경제가 막대한 피해를 보는 것을 막기 위해 호르무즈 해협에 군함을 파견하고 ‘해양 경찰’ 역할을 자임했다. 쿠웨이트 유조선에 성조기를 꽂아 미국적 선박인 것처럼 위장하거나, 아예 전함으로 호위하는 방식으로 해상 봉쇄를 뚫어냈다.
‘확고한 의지’(Earnest Will)로 명명된 유조선 호위 작전은 결국 미국과 이란이 교전하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하지만 1988년 이란·이라크전 종전 때까지 미국은 해협 안전을 지키는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요 항로는 오랫동안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가 보장됐고 덕분에 전 세계는 자유 무역에 기반한 고도성장을 누리게 된다.
<부산일보> 1987년 9월 23일 자 4면. 이란의 공격 위협 속에 미 함정이 유조선 호위 작전에 돌입한 사이 영국 선박이 피격당한 뉴스가 실려 있다.
오늘날 세계 무역의 80% 이상이 뱃길로 이뤄진다. 과거에는 해적단이 출몰하거나 부당한 영유권 주장, 과도한 통행료로 막히기에 십상이던 바닷길이 안전해진 것은 제2차 대전 이후 압도적 해군력을 앞세워 세계 바다의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한 미국 덕분이었다. 1979년부터 항행의 자유 프로그램을 운영한 미국이 ‘탱커 전쟁’에 개입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 ‘탱커 전쟁’은 미국이 1990년대 걸프전 등 중동 사태에 깊이 빠져드는 계기이자 패권이 작동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꼽힌다. 국제 유가와 자유 무역, 에너지 공급망 등 경제 이익을 넘어서는 의미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석유-달러-군사력이 맞물려 작동하는 삼각 구조가 놓여 있다. 세계 석유 거래는 오로지 달러로 결제되는 ‘페트로 달러’ 시스템이 원칙이다. 석유가 통과하는 최대 길목은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이다. 그리고 이 수송로의 안전은 미국의 군사력으로 보장된다. 에너지와 금융, 군사력이 일체화되어 배가되는 시너지 효과가 패권을 강화했다. 이는 러시아, 중국 등 경쟁자들을 영원히 따돌릴 수 있는 구조이기도 했다.
38년이 흐른 오늘날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한 에너지 위기 상황은 같지만, 과거 ‘탱커 전쟁’ 당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해상 운송 안전을 떠받쳤던 미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의지와 능력 면에서 미국이 크게 달라져 자유 진영 전반에 당혹감이 번지고 있다.
미국·이스라엘의 기습 공습으로 시작된 이란 사태는 지도부 참수와 압도적 공중 폭격만으로도 단기 승전보를 얻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이란의 호르무즈 봉쇄 반격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이 파병하지 않는 데에 여러 차례 서운한 감정을 표출하면서 노골적인 ‘괘씸죄 뒤끝’ 경고를 거듭했다. 하지만 한국은 유엔 결의 없는 전투 지역 파병은 전례나 현행법에 비춰 볼 때 선택지가 아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았다. 유럽 국가들은 한술 더 떠 국제법상 불법으로 규정하고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토하고 나서면서 대서양 동맹은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개전 38일 만인 8일 미국과 이란이 2주간 휴전에 돌입한 것은 다행이지만 앞으로 더 복잡한 셈법과 청구서가 기다리고 있다. 우선 미국의 침공 명분이 무색해졌다. 이란의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나 핵 개발 무력화에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러시아 정부가 “미국의 참담한 패배, 이란의 승리”라고 논평한 이유다. 향후 협상에서 난항을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과 같이 중동 석유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는 이란의 ‘해협 통제권’ 파장이 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 타국의 영해를 이용할 수 있는 무해통항권이 허용됐던 호르무즈에서 이란이 거액의 통행료를 징수할 권한을 갖게 된다면 모든 국가는 ‘의문의 1패’를 당하게 된다. 석유 수입국들에 전쟁 비용이 전가되고, 해협 통제권을 쥔 이란은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꼴이라서다.
지난 3월 11일 호르무즈 해협 인근 페르시아만에 발이 묶여 있는 화물선들. 로이터 연합뉴스
중동 에너지 수송로 통행을 둘러싸고 새 질서가 모색되는 대목은 미국 패권의 추락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해협 개방이 미국의 문제가 아니라면서 “유럽 국가가 하게 두자. 한국이 하게 두자”라며 줄곧 회피한 결과다. 이란은 영해를 공유하는 오만을 끌어들여 공동 관리하면서 서비스와 안전을 대가로 통행료를 부과할 조짐인 반면 영국은 한국, 일본 등 40여 개국과 글로벌 협의체 성격의 채널을 구축해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휴전이 선언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이란이 통행료를 공동 징수하면서 이권을 나누는 방안을 언급해 충격파를 남겼다. ‘아이디어 차원’이라는 설명이 붙긴 했지만 미국이 적대국과 손잡고 국제 해협의 유료화를 현실화한다면 해양 질서의 근간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말라카 해협이나 대만해협으로 유사한 통제가 확산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법이며, 용납할 수 없고, 세계에 위험하기 때문에 국제 사회가 맞서야 한다.” 지난 3월 27일 G7 회담에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이란의 통행료 부과 시도를 강력 규탄했다. 하지만 미국이 스스로 만들고 지켜온 항행의 자유 원칙은 폐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호르무즈는 어떤 형식으로는 ‘통행료를 내는 바다’가 될 가능성이 크다. 11일부터 열리는 종전 협상의 결과는 향후 세계 질서 재편의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중요 에너지 수송로에서 발을 빼는 것은 석유-달러-군사력 삼위일체의 위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미국 내 비판 여론도 거세다. 실제 이란 사태에서 미국 패권이 약화되는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됐다. 이란이 해협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중국 위안화 혹은 암호화폐 결제를 제시한 것은 ‘페트로 달러’ 체제의 균열을 의미한다. 파키스탄과 중국은 이란과 우호 관계를 지렛대로 휴전 협상을 중재하면서 미국이 친 사고를 대신 수습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동 징수’ 카드로 영향력 유지 의지를 천명한 것은 미 패권의 약화를 부인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린란드를 얻기 위해선 나토를 포기할 수도 있다… 내겐 국제법이 필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미국이 주도한 집단안보와 자유 무역 체제는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이미 유엔이나 나토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 국제 질서를 헌신짝 취급해 온 데다, 자유 무역의 가치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로 대체한 지 오래다.
80년대 ‘탱커 전쟁’이 유일 초강대국에 의한 국제 질서를 실증한 것이었다면 호르무즈 이후의 세계 질서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그것은 단지 중동의 불안정성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불확실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국제 질서의 균열로 자유 무역과 공급망 혼란은 시간문제다. 미국의 안보 체제와 자유 무역을 발판으로 고도성장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한국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자원 무기화와 각자도생이 뉴노멀이 되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세상은 호르무즈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