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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문송' 없는 회사
‘문송합니다’(문과라 죄송합니다)라는 유행어가 나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취업시장에서 이공계에 비해 홀대받는 문과 출신의 아픔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인문계의 90%가 논다’는 뜻의 ‘인구론’도 마찬가지 의미다. ‘문송’이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국내 산업구조가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수출형 제조와 IT산업 위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인문계 출신의 구직난은 대학의 인문계열 학과 통폐합, 교육·연구 수준 저하, 인문학 경쟁력 약화, 고교생의 인문계 기피, 취업률과 재학생 충원율 저조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국가 연구개발 정책도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 집중되면서 인문 분야 연구는 융합이나 보조적 역할에 머물렀다.
이공계 전공자가 취업에 유리한 현실에서 효성그룹이 창립 60년 만에 처음으로 인문계 전공자만 뽑는 신입 특별 채용에 나섰다. 이 회사는 지난 13일부터 22일까지 인문대학과 문과대학 학·석사 학위 취득자와 올해 8월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채용 서류를 접수 중이다. 사학·철학·미학을 비롯한 인문학 계열과 국어국문·영어영문 등 어학 계열 전공자가 대상이다.
섬유화학, 중공업 등에 주력하는 효성그룹이 정기 공채가 있는데도 창사 첫 문과생 전용 공채에 나선 것은 최근 급변한 사업 구조 때문이다. 효성은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AI데이터센터와 송배전 인프라 투자가 급증하면서 전례 없는 수주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글로벌 사업이 많아지면서 그룹 매출의 80% 이상이 해외에서 나온다. 주요 계열사인 효성티앤씨와 효성화학의 지난해 수출 비중은 각각 90%와 70%를 웃돈다. 효성중공업의 전력기기 사업의 수출 비중도 50% 이상이다. 효성의 글로벌 사업장은 30개국 120여 곳에 달한다. 이를 반영해 해외 현지 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 인문학적 소양, 어학 능력을 갖춘 글로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인문학을 통해 기술을 이해하지 않으면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없다’는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의 경영 철학이 반영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AI 시대가 고도화할수록 기업에선 기술개발뿐 아니라 고객을 이해하고 시장을 읽고 문화를 연결하는 인문학적 역량을 갖춘 인재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문영’(문과를 환영합니다)을 내세운 효성그룹의 파격적인 행보가 신선하다. AI 시대 제조업 인재상에 대한 변화를 촉발하는 신호탄이 될지 궁금하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
2026-07-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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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위험한 사마리아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의 세바스티야는 제국들이 지나간 흔적이 더께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기원전 북이스라엘의 수도일 때 지명은 사마리아였다. ‘팍스 로마나’ 시대가 남긴 휑뎅그렁한 신전 기둥과 세례자 요한이 옥살이했다는 전승, 비잔틴·십자군·오스만 유적과 함께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하는 역사적 공간이다. 지금은 올리브 나무를 키우는 팔레스타인 농부들의 삶의 터전이다. 옛 지명 사마리아는 신약 성서에 등장해 유명하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낯선 이들을 돌본 ‘선한 사마리아인’의 고장이다. 최근 이곳은 점령 당국 이스라엘의 일방적 발굴·개발 추진에 유네스코가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며 저지에 나서 주목받고 있다.
유네스코는 지난 5월 세바스티야 유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를 자제하라는 성명을 냈다. 180만㎡(54만 평)가 넘는 옛 사마리아 부지를 강제 수용하는 이스라엘 측의 법안이 논란을 불렀다. 팔레스타인이 행사하던 유적 관리권을 이스라엘로 가져오는 것이 법안의 핵심이다. 성경에 명시된 이스라엘 고대 유산 보호가 명분이다. 유적 발굴과 감시 시설, 방문객 센터·주차장·울타리, 마을을 우회하는 진입도로에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유적과 마을이 단절되고, 농업과 관광업 생계 기반이 빼앗길 것으로 우려한다. 유네스코는 부산에서 열리는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세바스티야를 세계유산 신규 등재와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동시 등재를 긴급 안건으로 지정했다.
세바스티야의 운명은 196개 회원국의 투표로 결정된다. 한국은 세계유산협약 가입 38년 만에 세계유산위원회를 부산에 유치했고, 의장국을 맡아 합의를 끌어내는 역할을 맡게 됐다. 한국전쟁의 고난이 새겨진 피란수도 부산에서 인류 공동의 유산 보존을 주도하게 된 점은 감개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유적의 발굴은 국제법을 준수해야 하고, 모든 관련 당사자의 동의와 협력 아래 이뤄져야 한다.’ 일본이 사도광산의 강제노역 역사를 지우려 했을 때 우리가 느낀 분노를 떠올려 볼 일이다. 유산 등재에 개발을 멈추게 하는 강제력은 없지만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인정되는 것이라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있다. 일방의 편을 들지 않되 동의와 협력을 주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원칙을 확인하는 일은 진부해 보여도 국제사회의 도움을 기다리는 옛 사마리아에는 결코 작지 않은 힘이 될 수 있다. 의장국 한국의 선한 영향력을 기대한다.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
2026-07-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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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비가 내리지 않는 장마
장마는 예부터 ‘길게 내리는 비’를 뜻했다. 옛말도 ‘오래’라는 뜻의 ‘오란’과 ‘비’를 더한 ‘오란비’였다. 나라에서는 장마가 너무 길어지면 날이 개기를 빌던 ‘기청제’를 지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순조 21년(1821년)에 장마가 무려 4개월 지속됐다는 기록도 나온다. 장마가 6월 초부터 9월 말까지 이어졌다. 당시 여러 차례 기청제를 지냈는데 소용이 없었다.
근래 가장 긴 장마는 2020년 중부지방 장마였다. 그해 중부지방 장마는 6월 24일 시작해 8월 16일까지 54일간 지속됐는데, 1973년 이래 가장 긴 장마였다. 제주에서도 장마가 49일간 이어졌다. 그 전엔 2013년 49일(중부)이 최장이었다. 북극에서 이상 고온 현상이 일어나 찬 공기가 남하하며 한반도에 장마전선이 이례적으로 길게 머문 때문이었다.
장마라는 이름이 무색한 해도 있었다. 지난해 남부 지방은 장마 기간이 13일에 그쳐 1973년(중부·남부 각 6일) 이후 역대 가장 짧은 장마로 기록됐다. 2010년 이후 장마는 강수일은 줄었지만 강수량은 평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비가 오면 폭우가 내렸다가 그 사이에 길게 불볕 더위가 이어지는 식이다. ‘도깨비 장마’ ‘마른 장마’ 같은 신조어도 등장했다. 예년 같으면 장마가 끝날 시기인 8~10월에 비가 잦은 경우도 많아 ‘2차 장마’ ‘가을 장마’ 용어도 쓰인다.
날씨 예측이 어려워 ‘괴담’ 수준의 정보들이 퍼지는 일도 잦아졌다. 각종 SNS에는 ‘8월에 40도 폭염이 찾아온다’ ‘역대급 더위가 예고됐다’ ‘한 달 내내 비가 내린다’ 같은 날씨 콘텐츠들이 공유되고 있다. 이런 정보 대부분이 허위인데, 요즘은 기상청도 장기 예보를 하지 않는다. 장마 기간 발표도 2009년부터 중단했다. 장마 시작과 종료 시점도 여름이 지나고 사후 분석해 발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장마의 모습이 많이 달라져 혼선이 빚어지면서 한국기상학회는 올해 ‘장마’ 관련 용어를 새롭게 정의했다. 장마는 ‘여름철에 여러 날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현상이나 날씨’, 장마철은 ‘다양한 기작에 의해 다량의 강수가 한반도에 발생하기 좋은 조건이 형성되는 기간’으로 정의했다. 장맛비는 ‘장마철에 내리는 비’를 뜻한다.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올 수도, 오지 않기도 하는 세상이 됐다. 100mm 넘는 장맛비를 걱정하다 하루이틀 후 폭염에 시달려야 하니 장마철이 이래저래 더 힘들어졌다. 조심, 또 조심이다. 김영한 논설위원 kim01@
2026-07-19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