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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갓성비' 점심
직장인들에게 점심 시간은 고단한 일상에서 잠시 쉼표를 찍는 시간이다. 메뉴 선택을 위해 행복한 고민을 하고, 가성비 높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삶의 활력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외식 물가가 고공행진 중인 요즘, 직장인들에게 점심 한 끼 해결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몇 년간 이어진 고물가, 고환율, 식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점심 비용이 오르는 ‘런치플레이션’이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2.1% 상승하며 올해 들어 4개월 연속 2%대를 이어가는 상황이다. 특히 지난달 외식 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3.2% 오르며 13개월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다고 한다. 부산만 해도 외식 메뉴인 냉면 가격은 평균 1만 1000원대, 삼계탕 가격은 1만 6000원대에 달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직장인과 시민들이 ‘갓성비’ 점심을 먹기 위해 기업이나 관공서 구내식당 등을 찾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의 구내식당들이 ‘신상 맛집’으로 떠오른다고 한다. 상업건물, 공공건물, 대학 캠퍼스 등 6곳에 7개의 구내식당이 성업 중이다. 점심과 저녁 모두 운영하는데 가격은 5000~7000원대다. 메뉴가 매일 다르고, 반찬 수도 7가지에 달하는 데다 제철 재료를 써서 인기다. 냉면, 백숙 등 계절에 맞춘 특식도 나온다고 하니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직장인들에겐 안성맞춤이다. SNS를 통해 센텀 구내식당이 알려지면서 외부인 방문도 늘고 있다. 1만 2000여 명의 센텀 직장인들에겐 구내식당은 소중한 존재다. 접근성이 좋은 부산 지역 구청 구내식당도 인기다. 외부인도 5000원대의 저렴한 가격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서다. 구청들은 주변 식당과의 상생을 위해 의무휴업일을 운영한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햄버거도 ‘갓성비’ 점심으로 주목받는다. 편의점들은 도시락, 샌드위치 등 가성비 높고 다양한 간편식 메뉴를 속속 선보이고 있다. 햄버거는 ‘저렴한 한 끼’ 이미지를 내세우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음료까지 포함한 세트가 1만 원 이하로 가격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고물가 장기화로 정부의 ‘밥상 물가 안정’ 노력이 절실하다. 농수축산물 할인 확대 지원, 치밀한 한미 관세 협상 전략 마련, 공급망 다변화 등을 통해 서민과 소상공인들의 고물가로 인한 고통을 덜어줘야 한다. 점심 한 끼를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날이 언제쯤 다시 올까.
김상훈 논설위원 neato@
2025-05-2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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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제비집
어릴 적 이맘때만 되면 내가 살던 시골집 처마 밑은 생기가 돌았다. 제비집 덕분이다. 제비가 처마 밑을 날아다니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제비집 한 채가 뚝딱 마련된다. 논흙을 물어다 처마 밑에 묻혀 놓은 것만 같은데 어느 순간인가 집 한 채가 탄생한다. 제비집은 소박하지만 견고하다.
제비가 그곳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를 때면 여간 소란스럽지 않다. 살아보겠다며 먹이를 받아 먹는 새끼 제비들의 소리에 늘 배고픔을 느꼈다. 낮잠을 방해받거나 제비똥 폭탄을 맞아 짜증을 내면 집안 어른들은 좋은 일이라며 흐뭇해 했다. 기분 좋은 일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같은 또래가 찾아와 신기한 듯 제비집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의기양양한 적도 많았다. “우리집엔 제비집 있다!”
제비가 사람이 사는 곳에 둥지를 짓는 것은 탁란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탁란은 어떤 새가 다른 종류의 새의 집에 알을 낳아 대신 품어 기르도록 하는 것으로 뻐꾸기가 대표적이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먼저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미처 부화하지 못한 알이나 갓 부화한 새끼들을 밀어내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혼자 게걸스럽게 자신의 새끼로 착각한 다른 어미새의 먹이를 받아 먹는다. TV를 통해 이같은 장면을 봤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탁란은 작은 새들에게 심각한 문제다. 생존을 위해 제비들은 인간 근거지를 선택했을 것이다. 탁란뿐 아니라 천적인 참매, 고양이, 뱀 등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어찌됐건 다른 동물들이 싫어하는 인간에게 자신의 새끼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 의탁하고 보호해 달라는 믿음이 제비에게는 있다.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사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을 보호해주고 살게 해주는 자연을 얼마나 망치고 있는가. 이웃 지역 주민들이 더러운 물을 먹고 알지도 못하는 질병에 죽어나가는 데도 맑은 물을 나눠주지 못하겠단다. 자기 것도 아닌 물인데도 말이다. 인간의 탐욕이란 끝이 없다.
한 번씩 드나드는 촌집에 얼마 전 제비가 집을 지었다. 포란 중이라 조만간 귀엽고 시끄러운 새끼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사실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즐겁다. 제비집 주변에 얼쩡거리는 고양이들을 쫓아내는 일. 태어날 새끼가 둥지에서 떨어져 다치는 일이 없도록 안전망을 설치하는 일. 믿음의 제비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2025-05-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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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대선 꼭 투표" 86%
‘민주주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나라마다 똑같지는 않다. 미국 출신의 북한학자 브라이언 마이어스 동서대 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사랑받지 못하는 공화국>에서 미국인은 ‘투표함’이나 ‘투표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떠올린다며 한국과의 차이점을 비교했다. 실제 구글 이미지에 ‘democracy’(민주주의)를 입력하면 투표하는 손이나 투표장 유권자 행렬 클립아트가 대부분이다. 집회와 시위 같은 집단 행동의 표상은 전무하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제도적 행위로 수렴된다.
한국은 민심이 중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네이버 이미지에서 ‘민주주의’를 검색하면 ‘국민이 지켜낸 민주주의’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 등의 메시지가 읽힌다. 서구에서 제도로 자리잡은 민주주의가 한국에서는 투쟁과 쟁취의 대상이다. 이는 시민 저항과 대규모 시위가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뤘기 때문이다. 87년 체제, 즉 제6공화국도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이다. 투표만으로 바뀌지 않는 현실에 맞선 시민 행동주의를 빼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제도 내의 참여(투표)와 제도 밖의 참여(저항)는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불가분의 요소다. 어느 쪽이 정답인가는 우문이다. 각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성취되는 경로가 동일할 수 없어서다. 다만, 민심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인 타협 추구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마이어스 교수의 지적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거리의 열정이 여전히 넘치는 한국이지만 선거 참여율은 상승 반전이 안 되고 있다. 과거 80%대였던 대선 투표율은 2022년 제20대 대선 77.1% 등 70%대에 멈춰 있다. 물론 지난해 미 대선(64.52%)과 2022년 일본 참의원 선거(52.05%)에 비하면 높지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을 살짝 상회하는 수준이다.
뜬금없는 비상계엄령에 이어 9년 만에 대통령이 다시 탄핵되는 대혼란 속에 치러지는 조기 대선. 정치라면 진절머리가 날 법도 한데, 유권자 86%가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응답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적극 투표층 비율은 상승했고, ‘투표하지 않겠다’는 3%에 그쳤다. ‘선거를 통해 국가 전체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데 동의한 비율 84.9%에서 투표 참여 응답률이 높은 이유가 설명된다. 세상을 바꾸는 동력은 거리에서 축적되지만, 민주주의의 완성은 선거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국민적 공감대로 읽고 싶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
2025-05-18 [17:49]